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아홉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전선사업을 이끈 대한전선이다.
대한전선 창업주인 인송(仁松) 설경동 회장은 동학혁명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1903년 3월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설 회장은 그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으면서 역경이 시작됐다.
설 회장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 마을을 떠나 친오빠가 있는 함경도 청진 인근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어머니는 다섯 살배기 아이를 서당에 보내 글을 가르쳤고, 7세가 되던 해에 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설 회장은 보통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삯바느질을 하며 자신을 보살피는 어머니를 더 이상 힘들게 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학교를 나온 지 3년 후 어느 정도 가계가 안정되자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방과 후에 떡을 팔고, 등교전 새벽신문을 돌리며 공부를 했다. 5년 만에 중학교를 마치고 상고에 입학한 설 회장은 사업 시작에 필요한 기초지식만 쌓으면 된다는 생각에 상고를 중퇴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오게 됐다.
스무 살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비록 중퇴이긴 했지만 상고 출신이란 학력은 취업에 큰 도움이 됐다. 지역의 군청에 자리를 잡은 설 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운송점을 운영하는 일본인 사장의 눈에 들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식민지 당시 조선인을 멸시하는 관청에서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돼, 직장을 옮겼다.
운송사업을 하는 ‘부춘 운송점’에서 1년의 운수업 경험을 쌓은 설 회장은 곧바로 사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일본인 화주와 삼광운송점과 함께 ‘삼광상회’를 설립한 것이다. 창업 이후 그는 항상 차별화에 대한 고민을 하며 남보다 한발 앞서 나가기 위해 고심했다.
성냥공장 인수해 첫 걸음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고향인 평안북도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이어가기 쉽지 않았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측에서는 수산업을 하던 설 회장의 선박을 무작위로 징발해 가는가 하면, 공장 설비와 기계설비도 무단으로 점유했다. 결국 설 회장은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내려오게 됐다.
설 회장이 서울에 터를 잡고 시작한 사업은 성냥공장이다. 1946년 8월 적산기업의 수원 성냥공장을 19만 원에 불하받았다. 남들이 모두 인수를 꺼린 사업이었지만 그는 국민들의 생필품 부족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성냥공장을 인수해 사업을 펼쳤다. 이는 당시 우리 국민들이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많은 곤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제조업의 진흥이 국가발전에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해 성냥공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1946년 10월부터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기 전 4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성냥통에 사슴 두 마리가 그려진 라벨의 쌍록표 덕용성냥은 불티나게 팔려 4년간 연평균 15억 원의 매출 실적을 거뒀다. 이는 설 회장이 주요 원료인 적린을 마카오에서 공수해 오는가 하면, 금융조합연합회를 통해 전국에 성냥을 유통하는 등 기존의 기업가들이 생각지 못했던 탁월한 사업수완을 보였기 때문이다.
설 회장이 1955년 대한전선을 시작한 것 역시 나라 걱정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강산을 보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 고심하던 차에 전선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국가 기간사업, 그 중 산업재 생산 분야로의 진출을 고민하던 차에 대한전선을 만났다.
당시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히 진행될 것이며, 전기분야에 대한 투자가 선행될 것이라는 사업성에 대한 전망도 적중했다. 그러나 기술 부족으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고, 결국 개인 재산까지 끌어넣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설 회장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술개발과 외자유치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꾸준히 기업을 성장시켰다. 이후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행으로 전선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성장, 그의 탁월한 사업가 기질이 빛을 발했다.
품질 향상…조선전선 인수
설 회장이 조선전선을 인수할 당시만 해도 조선전선의 공장 설비는 실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경기도 시흥에 자리한 전선공장에서는 고무절연 면피복 2종선 및 4종선과 나동선 등 생산되는 제품이 소수에 그쳤고, 생산설비는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들여온 기계가 전부였다. 설 회장이 인수하기 전 생산량은 연간 536톤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설 회장이 전선사업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장 내 기술자도 많지 않았다.
부족한 기술을 극복하기 위해 설 회장은 각처에서 자금을 끌어왔다. 동시에 엔지니어도 양성했다. 그는 발 빠르게 움직여 1955년도 UN한국재건단의 자금 50만 달러를 배정받아 기계 설비를 보수하고 전선제조설비를 구입했다. 1957년에는 기계설비 도입을 위한 미국 국제협력국(ICA) 시설원조자금 55만 달러 중 일부를 유치해 다시 한 번 시설 확충을 단행했다. 동시에 독일 기술자를 초청해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적극적인 자금유치와 연구개발을 통해 인수 직후 60명 수준이던 정식공원이 1958년에 100명을 넘어섰고, 수직형 성연기·압연기 등 기계설비도 크게 확충됐다.
이에 따라 생산되는 제품의 종류도 크게 늘었으며 생산량도 확대됐다. 1958년에는 나단선 322톤, 나연선 2600kg, 2종단선 61만4000m, 2종연선 32만4000m, 면권선 1500kg, 4종선 33만6000m 등 다양한 제품으로 시장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1958년 매출만 7억 1628만 환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게 됐다. 생산된 전선 제품은 경전·남전 및 남전 부산지점과 교통부, 체신부 등에 주로 공급하며 사업은 본 궤도에 안착했다.
시장성·성장잠재력 염두
설 회장이 광복 때까지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믿어온 삶의 신조는 바로 ‘판단이 빨라야 실기(失機)하지 않는다’이다. 그는 사업을 맺고 끊는데 있어서 늘 과감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광복 이후 북쪽의 사업을 포기하는데도 삶의 신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전선의 전신인 조선전선의 인수과정에서도 그의 신조는 적용됐다. 16명에게 분산돼 있던 조선전선의 주식을 전량 인수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해 회사 기틀을 마련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두 달에 불과했다.
그밖에도 그가 추진했던 사업들은 모두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1948년 한국원양어업, 1953년 대한방직, 1956년 대한제당 설립까지 그의 결정과 사업추진은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설 회장이 사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면서도 실패가 적었던 까닭은 상고를 거쳐 젊은 나이에서부터 실전 경영감각을 익혀왔기 때문이다. 특히 설 회장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바로 성장잠재력과 시장성이었다.
조선전선 인수도 이 같은 혜안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설 회장은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에 전기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당시 전선이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고 있어 경쟁자가 없고, 기반산업인 전기시설 확충을 위해 수요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돼 충분한 사업성을 내다봤다.
1956년 대한제당의 전신인 ‘대동제당’을 설립할 때도 이 같은 사업수완은 그대로 드러났다. 사세확장을 고민하던 설 회장은 식품사업에 관심을 갖고 사전 조사를 하는 과정에 선진국과 당시 한국의 차이를 발견했다. 1940년대 덴마크,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1인당 설탕 소비량이 이미 100파운드를 넘어섰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97파운드에 불과했다.
분명한 사실과 성장잠재력을 포착한 설 회장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 독일에서 기계를 발주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벌이며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확고한 투자전략은 국내 정치가 불안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4·19혁명 이후 들어선 민주당 자유정권은 부정불법 축재자 재산환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설경동의 대한전선, 대동제동 외 6개사, 이병철의 삼성물산 외 14개사, 구인회의 락희화학 외 4개사, 이양구의 동양시멘트 외 4개사 등 당시 내로라하는 재벌이 모두 포함돼 엄청난 금액을 정부에 내야했다. 이에 따라 설 회장 역시 47억여 환의 환수금을 정부에 내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대한전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4·19 이후 자금흐름의 악화와 원자재 상승, 매출 감소 속에서도 대한전선과 대한제당 등 설 회장의 기업들은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했다. 특히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부응해 대한전선은 생산설비를 크게 확충하면서 사업은 번창해 나갔다.
1960년 후반에 들어서 설 회장은 국민소득이 점차 증가하고 생활양식이 개선되는 것을 포착, 통신기기(교환기)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후에 대우전자의 모태가 되는 가전제품 생산으로도 영토를 확장하며 종합 전기 기기 회사로 명성을 날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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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