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먹 김두한 장남 김경민의 명예와 멍에
반공주먹 김두한 장남 김경민의 명예와 멍에
  • 이광수 기자
  • 입력 2013-05-13 09:44
  • 승인 2013.05.13 09:44
  • 호수 993
  • 1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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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공화국 자금 쓰려고 사카린 밀수한 것

아버지는 목숨 걸고 인분 투척
깡패 양아치들의 오야붕이 아니다

[일요서울ㅣ이광수 기자]2500명의 독립군으로 5만 명의 왜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백야 김좌진 장군, 해방 전 종로상권을 주먹으로 지킨 의송 김두한, 그리고 그의 손자이며 아들인 김경민. 1991년 가이후 도시키가 탑골공원에 방문해 자존심을 되찾자며 할복을 감행했던 그는 총과 칼, 주먹을 넘어 문화로써 투쟁하고 있다. [일요서울]은 김두한의 장남 김경민(59)씨를 만나 소위 ‘주먹’으로 투쟁하던 시절 자식들의 명암을 들여다 봤다.

김경민 씨는 서울에서 두 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고, 1991년 일본 가이후 도시키가 탄 차가 파고다공원 앞에 도착하자“나가자”고 외치며 가이후 도시키를 향해 뛰어나갔으나 경비중인 경찰에 제지당하자 자신의 양복안주머니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들고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며 자신의 배를 그었다. 또한 여러 독립운동 기념사업 등에도 활동하기도 했다.

독립군은 얼어 죽고 만군은 왕국 세워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중에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와 장관들에게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김경민씨는 “내가 말하려는 것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역사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일본군 소좌 출신이다. 그때 당시 정일권 총리는 대좌 출신이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사카린을 밀수했다. 그때 당시 서울시 예산이랑 맞먹는 양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이 한 줄 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만년공화국을 위한 자금으로 쓰기 위해.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아버지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핍박을 받으며 사셨다. 그러나 만군들이 만년공화국을 꿈꾸는 것을 보고 ‘살고 싶지않다’ 말씀하셨다. 독립군의 후예들은 삼대가 얼어 죽고, 맞아 죽는데, 만군들의 세대들은 왕국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인분을 투척한 것이다”며 분개 했다. 

“아버지는 1965년 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국가 내란음모사건으로 잡혀가셨다.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시게 된다. 그때 여야 국회의원들이 합동해 아버지를 빼내주었다. 사실상 아버지는 그때부터 죽어갔다. 그때는 국회의원도 얻어맞을 때니 말 다했지. 아버지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인해 죽어갔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그는“정치만 잘하면 된다. 여러 가지 음모설이 많았지만,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다. 딸이 무슨 죄가 있냐. 서민위해, 아버지의 죄를 속죄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개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그 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을 이어나갔다. 

누나 김을동 ‘가문의 영광’

“나는 종로, 마포 13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누나(김을동)는 2선 위원이다. 가문의 영광이다. 꼭 내가 의원이 되라는 법도 없다”며 “누나 나름대로 잘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없다”며 “외조카(송일국)는 정계 쪽에 관심도 없고, 그 쪽으로 가면 망가진다. 외조카는 자기 자리에서 또 다른 투쟁을 하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이어 그는 “자주는 못보고 가끔은 본다.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고 가족은 가족이다”며 본인이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은 나라를 지킨 독립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정치적 욕심이 없다는 김경민 씨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독립군의 역경은 말도 못한다. 때문에 독립군들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총칼로 싸우고, 주먹으로 싸웠던 시대를 거쳐 이제는 문화로 싸우는 것이 맞다.”

바빠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

아버지 김두한 의원은 주먹하나로 나라를 지킨 협객이라는 그는 “일제강점기 때 종로는 온갖 농수산물 거래가 이뤄졌다. 돈이 몰리는 곳이니 일본인들이 얼마나 많이 개입을 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주먹하나로 종로 상권을 지켰다. 그거 하나로 대단한 사람이다”라며 일본의 만행에 대해 치를 떨었다. 

이어 그는“워낙 바쁘셔서 많이 뵙지는 못했다. 단지 아버지니깐 아버지다”며“독재정권과 싸우고, 남북 간 혼란시절 반공주먹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아버지 부하들이 살아생전 아버지에 대해 딱 한마디 했다. ‘셌다. 셌어’ 아버지가 싸우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부하들과 어머니를 통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나에게 명예이며, 멍에이기도 하다. 행동과 행실에 조심해야하며, 알게 모르게 제약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깡패들이 우리아버지를 자기네 오야붕으로 만든 것이지. 사실상 그들과 아버지는 확연히 다르다. 이정재나 임화수 같은 경우는 정권에 빌붙어서 서민들을 괴롭히고 갈취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서민들을 위해 투쟁을 했다. 때문에 깡패들에게 모진 고문과 도전을 받았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 태극기 깃대봉에 있는 무궁화 모양이 전부 다르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때문에 태극기 보급 사업을 할 것이다”라며 문화 사업을 통해 역사를 바로 잡는 ‘문화협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라소니, 임화수 아들 연 따라 만나

나의 투쟁이 문화로써 이뤄지길 바란다는 그는 “영화, 드라마 관련해 시라소니 아들 이의현 씨와 임화수(본명 권중갑)아들 등 그 당시 자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의현씨는 목사를 하고, 임화수씨 아들은 일본에서 사업을 한다. 연 따라 보는 것이지 따로 연락하고 만나지는 못 한다”며 깡패와 아버지는 엄연히 다름을 재차 강조했다.

문화협객으로 뜻을 펼칠 수 있는데, 굳이 정치를 할 이유가 없다는 그는 “이젠 문화전쟁이다. 영화와 음악을 통해 역사를 알리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적 인식을 문화로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때가 됐다. 다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재조명을 하고자 한다.

또 5월 30일에 음반이 나온다. 이 음반은 독립군들의 시에 곡을 부쳐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이 부르는 것이다. 현재 싸이나 조용필과 버금가는 호응을 기대하고 있다.

시대적 전쟁은 칼과 총과 주먹으로 이룬 현재다. 또한 김경민 씨가 말하는 문화적 전쟁은 현재. 김경민씨가 이룰 또 다른 투쟁일 것이다.   

이광수 기자 pizacu@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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