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서막을 올린 동국제강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모르지만 동국제강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서막을 올린 기업이다. 특히 창업주인 대원(大圓) 장경호 회장은 77세 삶 전부를 철강사업을 통한 제철보국 실현에 바친 선 굵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유학…보성고보 입학
장 회장은 1899년 9월 인동(仁同) 장씨 남산파 31대손으로 부산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네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우리나라는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이라는 피맺힌 한에 울부짖어야 했던 암흑기였다.
부농이었던 부모 밑에서 평범하게 살던 그가 민족의 아픔을 깨달은 계기는 1912년 서울 유학길에 올라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일본인들의 갖은 만행을 보면서 눈물의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졸업 후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수사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서의 1년 남짓한 외지생활을 통해 ‘경제 부흥이야 말로 일제치하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장 회장은 맏형 장경택이 일하는 목재소에서 일하는 틈틈이 10여 년간 경영의 기초를 배웠다. 이어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 쌀가마니 수입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추수를 하는 가을철에는 귀한 물건이지만 봄이나 여름철에는 쓸모없이 흩어져 있는 가마니를 보면서 ‘저걸 수집해 놓았다가 팔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내 그는 1929년 첫 회사인 ‘대궁양행’을 설립했다. 일본인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언제나 농민들에게 가마니 값을 제대로 쳐주는 등 겸손함으로 수완을 발휘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하루 한 끼, 많이 먹으면 두 끼를 먹으면서 고통을 나눴다.
일제의 쌀 공출과 군수물자 수송에 필요한 가마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자 장 회장은 서른일곱 살 때인 1935년 ‘남선물산’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부산 광복동에 자리잡은 남선물산은 가마니공장 외에도 수산물 전국도매업과 미곡사업, 정미소 경영, 양철로 석유 깡통을 만드는 제조업에도 착수해 크게 번창했다.
철과의 만남 ‘조선선재’
1949년, 장 회장은 일생을 뒤바꾸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광복 후 남선물산 창고 한쪽을 임대해 신선기(伸線機)를 설치하고 철사와 못을 생산하던 재일동포가 화재를 만나 운영난에 빠지자 장 회장에게 기계를 인수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업의 변화를 직감한 그는 인수를 결심했고 그 회사가 바로 동국제강의 모태인 ‘조선선재’였다.
전쟁 발발 후 남한에 있던 철강시설이 거의 사라져 버린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선재는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부산에 위치한 덕분에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이때 철선과 못을 생산해 모은 돈이 바로 동국제강의 창업기반이 됐다. 훗날 장 회장은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한 조각 고철이라도 열심히 모아, 이를 녹여서 민생에 조그만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장 회장은 1954년 7월 서울 당산동 4가 91번지에 ‘동국제강’을 설립했다. 동국제강 설립 전 그는 자손들도 긍지를 갖고 이어받을 수 있는 사업인 동시에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애국사업을 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바로 쇠를 다루는 사업인 철강사업이었다.
현대적 민간 철강업 시작
조선선재로 철강사업 경험을 쌓은 장 회장은 영등포에 있던 한국 특수제강을 인수함으로써 동국제강을 완성했다. 동국제강의 출범으로 한국철강공업의 역사는 비로소 현대적 민간 철강공업의 태동을 맞았다.
당시 철강업계의 초미의 과제는 국토재건운동으로 인해 불어나는 못과 선재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중간소재인 신선재(Wire rod)를 생산할 소재공장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자본금 1000만 환, 종업원 40명으로 출발한 동국제강은 1954년 8월부터 당산동 공장에서 본격적인 철강소재 생산에 들어갔다.
비록 출발은 조촐했으나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1959년에는 신선재, 1961년에는 철근 생산을 시작했다. 못을 만드는 소재인 신선재의 생산능력은 연간 4만 톤 규모였다.
현재 규모로 본다면 유아기 형태였지만 민간자본만으로 신선재를 국내 최초로 공급해 선재 제품을 일관생산체제로 구축한 것은 장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과 결단, 신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최초 50톤 고로 준공
1960년대 들어 동국제강은 신규 투자를 통한 대규모 사업장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에는 장 회장의 다섯 아들인 장상준·상태·상철·상건·상동이 회사 경영에 참여한 시기였다.
1962년 1월, 장 회장은 이사회를 열어 대규모 철강단지 건설계획을 결정했다. 부지 물색을 위해 고민을 거듭한 동국제강은 최종적으로 과거 ‘분개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부산시 용호동 남구 용호1동 188번지 일대로 결정했다. 1년여 간 미국에서 철강산업 및 산업단지를 시찰한 장 회장이 대규모 산업단지 대부분이 해안을 매립해 지어졌다는 공통점을 깨닫고 ‘바다가 있는 곳으로 찾아봐라’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62년 12월, 바다 매립 면허를 얻은 직후 본격적인 매립공사를 시작한 동국제강은 220일 후인 1965년 10월 1공구를 완공했다. 이곳에 서독제 자동압연기와 용광로, 전기로 등을 시설해 당시 국내 최대 철강 일관 작업공장이 건립됐다. 22만 평의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고 공장을 지은 것이다. 용호동 앞바다를 메우는 대역사가 시작되자 재계에서는 무모한 도전이 아니냐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철강산업은 자금투자 규모가 막대해 국가정책사업으로 추진해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데 민간자본으로 현대적인 대규모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장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가끔씩 부산 공사현장을 방문한 그는 아들들에게 “사람 가는 길은 천 번 물이 꺾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꺾이지 말고 단숨에 가는 길이란 의미가 없다. 가다가 혹 꺾인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라.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한쪽으로 길이 열려있는 게 세상사 이치다”고 말했다.
모든 이들의 우려를 비웃듯이 용호동 공장 건설은 성공적으로 완공됐다. 1964년 8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부산제강소를 방문해 장 회장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용호동 공장이 이뤄낸 업적은 컸다. 1965년에는 국내기업 최초로 50톤 고로를 준공해 우리나라에 고로 시대를 열었고, 아연도강판 공장을 지어 베트남에 수출하는 등 철강업의 국제화 시대를 알렸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국내 최초인 제1전기로(15톤)와 종합압연 공장이 준공됐다. 이로써 동국제강은 고로 1기, 소주로 4기, 용주로 2기, 제선설비 및 전로 4기, 전기로 1기, 압연기 4식 등을 갖춰 제철·제강·압연 일관생산체제를 갖췄다.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1971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후판공장을 준공했다.
공장이 완공된 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추진되자 철강제품의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웃돈을 얹어줘도 물건을 줄 수가 없을 정도로 공장은 풀가동됐다. 장 회장의 뚝심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쾌거였다.
일관제철사업 양보
장 회장이 철강이란 한 우물만 파게 된 것은 철강산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철강산업에서 좀 더 욕심을 부려볼 법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1964년 박 대통령이 동국제강 부산제강소르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장 회장에게 고로를 포함한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장 회장은 “종합제철소는 민간기업이 하기에는 역부족하므로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며 완곡히 사양했다.
이후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現 포스코)을 설립했고, 이 사업은 박 대통령의 최 측근이었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추진했다. 장 회장과 3남인 장상태 사장은 직접 사업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철에 대한 지식을 모두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포항제철소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장 회장이 사망한 후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제 막 오너 자리에 오른 아들 장세주 회장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그들의 우정은 회사 차원으로도 이어져 지금도 포스코와 동국제강은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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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