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동양]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4-29 10:32
  • 승인 2013.04.29 10:32
  • 호수 991
  • 4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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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일곱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빚더미 회사로 출발해 국내 최고 시멘트 회사로 성장한 동양그룹이다.

창업주 이양구 회장
동양그룹의 창업주인 서남(瑞南) 이양구 회장은 1926년 10월 14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풍서리 58번지의 작은 농가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회장의 유년시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가세가 조부의 별세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설상가상으로 부친마저 2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해 가파른 역경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남편을 잃은 충격과 생활고가 겹쳐 내내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나이에 행상에 나서야 했다.

1931년 15세의 뒤늦은 나이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움켜진 그의 손은 마디마디가 온통 부르터 있었다. 집안 형편상 도저히 진학을 꿈꿀 수 없었던 이 회장은 함흥에 소재한 ‘함흥물산’이라는 식료품 도매상에 취직했다. 남보다 근면하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 끝에 3년 만에 정식사원으로 인정받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 회장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정직과 신용’이라는 상도를 깨달았다. 또 일본 기업에 근무하면서 느낀 나라 빼앗긴 설움은 그가 기업을 창업한 뒤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굳은 철학으로 승화돼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1938년 이 회장은 8년간 저축한 돈을 자본으로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개업했다. 그가 선택한 유일한 경영지침은 오직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개업한 회사는 일제에 의해 발령된 ‘회사강제청산령’으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지만 1945년 이 회장은 광복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자전거 한 대로 거리에 서기 시작한 지 꼭 1년 만인 1947년 자본금 600만 원으로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했다. 이 회장의 근면함과 독창적인 판매방식으로 거래선은 날로 늘어갔고, 취급하는 물품도 과자 뿐 아니라 설탕 등 기타 식료품까지 확장됐다. 1년 후에는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산규모가 10억 원에 달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잠시 이 회장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38선이 그어지고 북녘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시작되면서 이 회장은 상인으로서 자유경쟁을 기대하기엔 힘든 환경이 돼버렸다. 결국 월남한 이 회장은 서울에서 그동안 터득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과자 판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과감하게 외상거래를 시작했다. 이러한 판매제도를 스스로 ‘수형거래’라고 불렀는데, 이는 과자를 배달한 뒤 보름 후에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으로 남한에서 실시된 최초의 외상거래였다. 이는 제과 업계나 후일 대기업을 일으킨 타 기업의 창업주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빚더미 회사 다시 일으켜

1956년 이 회장은 삼척세멘트(현 동양시멘트) 인수를 제안 받았다. 당시 삼척세멘트는 시설이 낡은 데다 경영자금마저 부족해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삼척시멘트 인수를 결심했을 때 동양제당 경영진은 “다른 돈벌이도 많은데 왜 골치 아픈 공장을 인수하느냐”며 반대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은 제분, 제당, 면방직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휴전을 계기로 전·후 재건사업이 활발해져 국내 시멘트공장이 삼척세멘트 하나뿐이었음에도 제대로 가동조차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으로는 시멘트공업과 같은 국가 기간산업을 정책적 지원 없이 민간 자본만으로 꾸려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삼척세멘트공장은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대상은 아니었다.

이 회장은 회사 간부들과 동업자였던 이병철, 배동환씨를 간곡하게 설득했지만 결국 삼척세멘트를 단독 인수하게 됐다. 그는 인수 직후 회사명을 ‘동양세멘트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새 출발을 다짐했다.

이 회장이 삼척세멘트공장을 인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시멘트공업의 국가경제적 의의와 삼척세멘트공장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이었다.

이 회장은 그의 기업가적 예측력으로 시멘트공업이 앞으로 한국 근대화에 큰 축이 될 것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국가 기간산업임을 확신했다. 당시 막대하게 수입되던 시멘트가 이를 증명했다.

그는 공장 인근에 다량 매장돼 있는 석회석과 무연탄, 해사와 점토, 삼척 인근의 철광석, 삼척화력발전소의 동력을 이용하면 시멘트의 대량생산과 비용절감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울러 철도소송 사정이 매우 불리했던 당시 여건에서 삼척공장은 바다를 낀 유일한 시멘트공장이었기 때문에 해송을 활성화시킨다면 전국 어느 곳이라도 신속하게 시멘트를 수송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 회장은 동양시멘트 인수 후 국내 시멘트 수요가 계속 증가하자 노후시절 교체 및 설비증설에 나섰다.

당시 그의 주요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상공부, 재무부, 부흥부 장관실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장관들이 출근도 하기 전에 장관실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58년 동양시멘트는 우리나라 민간기업 최초로 DLF차관(미국의 유상원조)을 받았다. 사실 낙후된 공장시설과 형편없는 인력 등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차관을 받아내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당시 송인상 부흥부 장관은 이 회장 추모집 ‘서남보다 큰 사람’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여러 곳에서 DLF차관을 신청해 나를 비롯한 한국 관리와 미국 측 조정관이 현지 시찰을 갔는데 삼척공장 시설이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동양시멘트에 DLF차관이 돌아갔느냐?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서남의 확고한 신념과 열정이 정부 측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용기와 신념이 매우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동양세멘트는 곧 증설에 들어가 첫 단계로 연산 20만 톤, 후일 독일차관으로 40만 톤을 증설했다.

위기를 기회로…4차 공장 증설

이 회장은 잇따라 계열기업을 창업하면서 1970년대 초까지 시멘트와 제과를 중심으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71년 그룹 전체가 휘청댈 정도의 위기를 맞았다. 기존 업체의 신규증설과 신규업체의 대거 참여로 시멘트가 남아돌고 정부의 금융긴축정책 실시로 그해 9월 30억 원의 사채와 27억 원의 은행 대출에 대한 채권정지신청을 법원에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채권자들과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같은 해 12월 법원의 보전 신청을 자진 취하, 사태를 매듭지었다.

이 회장은 곧바로 4차 증설공장을 단행했다. ‘뒷수습도 덜 된 마당에 무슨 증설이냐’는 임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는 뚝심으로 밀어 붙였다. 그 결심은 옳은 것으로 판명됐고 이후 경제개발 정책과 맞물려 사회 직·간접 자본과 주택건설로 시멘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업은 순항하게 됐다.

박정희 첫 면담…근대화 열변

1960년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계층의식이 만연해 있어 기업가들을 ‘장사꾼’이라고 칭하며 평가절하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기업가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혹 만나더라도 몇 마디 부탁의 말을 건네는 일로 끝나곤 했다.

이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이양구학파의 핵심 멤버였던 이동원 박사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 박사는 박 대통령에게 “이 회장은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며 굉장한 애국자”라고 소개했다. 

보통 장사꾼이라면 최고 권력자였던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을 텐데 그는 달랐다. 박 대통령과의 첫 대면에서 외 회장은 조국 근대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북통일의 필요성과 전제조건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해냈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였지만 만인지상의 권력자였던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나는 기업가가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스스로 ‘말조심 한다고 했는데, 할 말 못 할 말 다 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상황이 쉽게 짐작된다.

어울려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이 회장은 특히 국가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정치가 국가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몇 차례 더 독대할 일이 있었지만 이 회장은 특유의 열변으로 평소 소신을 피력했고 박 대통령은 메모하면서 경청했다.

1967년 8월, 고속도로 건설문제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이 회장을 불렀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시멘트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양회공업협회 회장이었던 이 회장을 불러 의견을 물은 것이다.

고속도로 문제가 일단락될 쯤, 그는 불쑥 ‘지붕개량’ 문제를 꺼냈다. 당시 우리나라 산이 민둥산인 것은 벌목 때문이었고, 서민들이 벌목을 하는 이유는 땔감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짚으로 지붕을 했는데 지붕을 개량해 짚을 땔감으로 쓰면 벌목이 줄어들고 산은 다시 푸르게 변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는 훗날 새마을 운동의 단초가 됐다.

이 회장은 당대의 실력자들을 만나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큰 비전을 갖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기업을 일구려면 당장의 이익을 위해 ‘시류와 야합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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