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아모레퍼시픽]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4-23 10:38
  • 승인 2013.04.23 10:38
  • 호수 990
  • 4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름다움의 씨앗이 아시아를 꽃피우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여섯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 아모레퍼시픽이다.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의 창업주인 장원(粧源) 서성환 회장(1923~2003년)이 화장품 사업에 첫발을 들여놓던 해방 당시만 해도 국내 화장품 산업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패기와 특유의 개성상인 기질을 발휘해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회장 서성환
서 회장은 화장품 사업을 이어가면서 회사의 이익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고 외국회사와 기술제휴를 선도하는 등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머릿기름’으로 출발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화학공업이 처음 문을 연 건 1945년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역사는 193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 회장의 모친인 윤독정(1891~1959년) 여사는 이미 1930년대부터 개성 자남산 자락에 있는 기름시장에서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가 10살도 되기 전에 시작된 가업이었던 셈이다.

이후 차츰 제품을 늘려나가 화장품까지 다뤘다. 1939년 서 회장이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쯤, 가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와 있었고 윤씨는 본격적으로 그에게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원료와 자재의 구매부터 시작해 화장품 제조법, 판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직접 가르쳤다.

1944년 서 회장은 21살의 나이로 강제 징용을 당해 한차례 굴곡을 겪게 됐다. 중국 선양, 만주 등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귀향하지 않고 베이징에 머물렀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모친이 일군 가업을 키워나가고 싶었지만, 중국의 문물과 풍습을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중국에 있을 당시 시장을 많이 다닌 그는 그들의 상술을 관찰하며 자신만의 사업을 구상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해서도 서 회장은 계속해 사업을 이어나갔다. 이때 만든 포마드 크림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태평양’은 그렇게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전국적인 화장품 회사로 이름을 떨쳤다.

외국 화장품 업체와 기술제휴를 시도한 일도 태평양이 국내 최초였다. 1959년 서 회장이 프랑스 화장품 업체 코티사와의 기술제휴에 나섰을 때 업계는 물론 정부의 반대가 심했다. 한동근 전 사장은 “상공부에서는 원료를 수입하는 게 무슨 기술제휴냐며 승인해주지 않았고, 업계에서는 밀수라고 주장하며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코티분’은 대히트를 쳤다. 서 회장의 아들이자 현 아모레퍼시픽 대표인 서경배 사장은 회사의 역사를 네시기로 구분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코티분 시대일 정도다. 이 제품이 나온 뒤 태평양은 대기업으로 발돋움했고, 국내 화장품 업계 역시 본격적인 기술제휴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서 회장의 욕심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코티분 성공 후 유럽 화장품 업계를 시찰한다는 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일본 최대 화장품 업체인 시세이도사에도 수차례 다녀왔다. 당시 외국을 나가는 일 자체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서 회장의 이 같은 행보는 국내 화장품 업계를 선도하는 계기가 됐다.

연구개발비 매출액 3.5%로

서 회장은 50년이 넘게 한 곳에서 일하며 ‘앞선 기술과 품질’이란 가치 구현에 전력을 다했다. 이런 신념 하나로 서 회장은 1954년 업계 최초로 화장품연구실을 개설했다. 1957년부터는 매해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으로 직접 보내 선진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피부과학연구소에 집중 투자했으며, 1994년에는 의약연구소를 세워 신약개발과 건강한 식문화를 연구하는 일도 이어갔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헬스연구동, 식품연구소 등도 추가해 건강과 미에 관한 연구개발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현재 이 회사는 기술연구원 인력만 350여 명으로, 국내서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매출액 대비 약 3.5%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 결과 로레알, 에스트로더 등 세계적인 화장품 업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게 됐다. 또 아시아 지역의 여성 가운데 50% 정도가 사용하고 있는 미백화장품을 개발한 것은 물론 자외선차단제, 주름개선 화장품 등 비교 우위에 있는 기능성 제품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특히 창업 때부터 이어온 식물에 대한 깊은 이해는 아모레퍼시픽이 해외시장에서 인정받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삼으로 유명한 개성지역 출신답게 서 회장은 1697년부터 인삼 중심 한방미용법 연구를 직접 지시했고, 전통 약용 식물의 피부효능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해냈다.

이 같은 연구 끝에 1997년 출시한 한방화장품 ‘설화수’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출시 4년 만에 매출액 1000억 원을 돌파하는가 하면, 2008년에는 단일 브랜드 최초로 5000억 원을 넘어섰다. 이는 국내 전체 화장품 시장에서 점유율 10%가 넘는 수치며 한방화장품만 따졌을 때는 60%에 육박한다.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은 오는 2015년 글로벌 비전 달성을 위한 핵심 키워드를 ‘자연’, ‘ 환경’, ‘첨단’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우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천연자원을 확보하고 이로부터 기능성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국내외 우수대학 및 연구기관들과 다방면으로 연구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시베리아, 아마존, 극지 등의 식물을 이용한 기능성 화장품 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며 전용 약초원을 설립하는 등 국내산 한방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사회책임경영 완수

서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항상 고민했다. 1959년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꾼 뒤 그는 매년 배당을 실시했다.

그는 배당이야말로 주주들에 대한 기업의 기본적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난 1977년 외환위기 당시 배당률을 높인 것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인류에 봉사한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는 그의 평생신념이었던 셈이다.

서 회장은 196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성환장학금’을 중앙대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10년 뒤에는 태평양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논문공모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장학활동에 대해 “회사의 재무구조에 상관없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유량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후에도 학교법인 태평양학원을 설립하고 태평양 박물관을 개관하는 등 남보다 한발 앞서갔다. 이후 서 회장은 별도 복지재단을 설립해 사회공헌활동을 복지분야로까지 넓혀 나갔다.

이 같은 서 회장의 신념은 2000년대 들어 아모레퍼시픽이 교육, 학술분야는 물론 문화, 복지, 환경, 여성 등 사회 다양한 분야로 공헌활동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이후 직접 공헌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공익재단 설립을 도와 간접적으로 후원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특히 2010년에 10년째를 맞는 한국유방건강재단의 핑크리본 캠페인은 이미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여성을 위한 대표적인 공익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아모레퍼시픽은 2000년 유방암 퇴치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관련 의학자를 비롯해 언론, 재계 법조계 등 각계 인사들의 뜻을 모으고 전액을 출자해 비영리 공익재단을 세웠다.

재단 설립 이후에도 해마다 재단운영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과 인적·물적 자원을 대부분 지원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마라톤대회는 물론 핑크리본 자선콘서트 등을 통해 아모레퍼시픽은 여성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을 대표하는 기업이 됐다.

서경배 사장 역시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계인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기업 시민이 되고자 합니다. 기업시민주의 정신은 강력한 기업 경쟁력의 원천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은 환경보전에 힘쓰고 윤리경영, 투명경영, 사회공헌활동을 통한 사회책임경영을 완수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서 사장이 그리는 아모레시픽의 미래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