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 전 문경시장 자서전27
신현국 전 문경시장 자서전27
  • 신현국
  • 입력 2013-04-23 10:32
  • 승인 2013.04.23 10:32
  • 호수 990
  • 2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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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스피치는 매우 간결합니다. 어려운 말 대신 누구나 이해하는 쉬운 말을 씁니다. 반복화법을 사용해 청중들의 집중력을 높입니다. 매우 감성적인 표현으로 심금을 자극합니다. 목소리에도 힘이 있습니다. 역동적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은 탁월한 스피치로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재선에 성공했지요. 링컨, 케네디 대통령도 명 연설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002년 문경시장 선거에서 공천을 받고도 떨어진 이유 중의 하나가 솔직히 스피치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합동연설회가 있었지요. 합동연설회에는 모든 후보 진영의 지지자들이 동원되는데 후보자별로 정견 발표가 있었지요. 당시 대중연설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최악의 스피치였습니다. 그때 합동연설회에서 조금만 잘 했다면 1300표차는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스피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통감했지요.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2006년 선거와 2010년 선거에서는 더 이상 스피치 때문에 손해를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4년 동안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가는 차속에서도 틈나는 대로 혼자 스피치 연습을 했습니다. 고함도 질렀고 목소리도 단련했습니다. 그렇게 단련한 스피치 덕분에 2009년 12월 제6대 새누리 정치대학원 총동문회장 선거에서는 5분 스피치로 불리한 선거를 역전시켰지요. 당시 저는 지방에 있어서 모든 여건이 불리했기에 모두들 제가 어렵다고 얘기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5분 스피치로 상황을 역전시킨 것입니다. 스피치의 중요성을 그때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스피치는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스피치는 선거에서 큰 돈 들이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4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터득했습니다. 
 
 
5. 불쌍해 보여야 한다
 
- L팀장 : 선거에서는 불쌍해 보이면 당선되고 반대로 똑똑해 보이면 떨어진다고 하던데요.
▲ 신 :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저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제가 2번 당선되고 2번 떨어졌는데 2번째 당선 될 때는 저의 처지가 대단히 어려울 때였지요. 한마디로 불쌍해 보일 때였습니다. 2006년에는 상대방이 현직시장에 돈도 많고 조직도 많았지요. 지역의 유지분들, 기관단체장들이 상대 후보를 도와주고 있었지요. 반대로 저는 한번 떨어지고 다시 출마했는데 돈도 없고, 또 떨어지면 정말 오갈 데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 선거 때도 앞에서 얘기 드린 바와 같이 가택압수수색, 영장청구까지 억울하게 핍박받는 극한 상황이었지요. 2번 떨어질 때는 상황이 반대였지요. 2002년 선거는 중앙부처 고위관료 출신에다 그동안 객지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 같았고 공천까지 받은 상황이니 전혀 동정심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지요. 2012년 국회의원 선거는 시장임기 다 채우지 않고 자기 멋대로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출마한 것으로 시민들에게 비쳐 반감을 산 것이지요.
불쌍해 보일 때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불쌍해 보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겸손, 진심으로 유권자에게 가까이 간다는 뜻이지요. 불쌍해 보일 때는 극한 상황이지요. 진정성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진정성이 언제나 최고의 덕목입니다. 진정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안철수 신드롬도 진정성과 진심에서 온 것이라 판단합니다.
 
저도 정치를 오래하지는 못했지만 ‘겸손해야 된다’, ‘낮추어야 된다’, ‘더욱 더 자세를 낮추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오만하고 자만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것을 저는 4번의 선거에서 겨우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거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저도 모르게 오만과 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겸손해라”, “자만하지 마라"를 수없이 들어왔고 저 스스로도 그렇게 얘기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긴장이 풀리며 자세가 높아졌습니다. 오만해지면 가까운 분들의 충정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 때도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출마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심지어 제 아내, 제 아들까지 간곡히 만류했지만 그때는 그 얘기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보다 저의 생각이 맞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꽉 차 있었지요. 다른 얘기는 들리지 않으니 얼마나 오만한 태도입니까. 오만할 때는 남의 얘기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만할 때는 자기가 오만한지도 모르게 됩니다.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면 선거는 끝장입니다.
 
 
제16장 
새옹지마(塞翁之馬)
 
1. 5전 6기
 
- L팀장 : 입학시험만 5번을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6번째가 돼서야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가 모이는 카이스트(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에 합격하셨습니다. 
▲ 신 : 저도 미스터리라 생각됩니다. 학교다닐때 공부를 그렇게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입학시험에 잘 떨어졌습니다.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 드렸지요. 초·중·고·대학의 입학시험만 연속으로 5번을 떨어졌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 2번, 고등학교 1번, 대학 1번, 대학원 1번이었지요. 
 
- L팀장 : 그런데 시장님의 이력서를 보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구의 Y대 농과를 졸업하고 어떻게 한국과학원(KAIS)에 합격할 수가 있었습니까. 1970년대 한국과학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간 곳이 아닙니까. 
▲ 신 : 그렇습니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께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로 과학원을 설립해 재외과학자를 초빙, 우수한 교수진을 구성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병역혜택과 학자금 지원 등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었지요. 2년간 수학하면 석사학위도 주고 공무원으로 가면 기술고시 출신과 마찬가지로 사무관으로 특채를 시켜주었지요. 전무후무한 지원이었지요. 
그 때 과학원에는 7개의 학과가 있었습니다. 농과 출신으로 갈 수 있는 전공은 생물공학과가 있었지요. 입학정원이 겨우 15명이었으니 제가 지방대 농과를 나와 과학원에 합격한 것은 제 인생의 기적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정말 과학원 합격하기 위해 대학 졸업하고 1년간 죽기로 공부했어요. 제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제가 죽기로 공부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때 지금 아내와 7년 간 사귀고 있었는데 아내와 저는 나이가 같지요. 그 때 군대는 연기를 해놓은 상태라 과학원 시험 떨어지면 군대를 가게 되고 아내와 헤어질 것 같았습니다. 아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죽기로 공부했던 것 같아요. 정말 극한 상황에서는 기적이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그때 또 체험했습니다. 결국 5번 입학시험 떨어지고 6번째 과학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5전 6기라고 할까요.
 
 
2. 학벌, 전공 콤플렉스
 
-L팀장 : 환경부에 근무할 때 지방대학 나왔다고, 그리고 농과대학 나왔다고 서러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신 : 농촌진흥청에 근무하다가 80년 환경부의 전신인 환경청으로 옮겼지요. 앞으로 환경청이 전망이 좋다는 선배의 얘기를 듣고 옮겼는데 환경청의 텃세(?)가 대단했습니다. 한번은 옆 부서에 결재를 들어갔는데 A과장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묻는 말에 답을 제대로 못하자 A과장은 대뜸 어느 대학 졸업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우물쭈물하다가 사실대로 대답을 했더니 “그러니깐 이 모양이지”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동료사무관들의 학벌에 주눅이 들고 있었는데 그날 그런 창피를 당하고 나니 참으로 사무실 나가기가 싫었습니다. 게다가 전공도 농과를 했다는 게 항상 콤플렉스였지요. 사무관 이상의 고위관료들의 전공은 대부분 법대, 상대이고 학교도 소위 명문대 출신이었지요. 학벌 콤플렉스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 L팀장 : 그래서 학벌 전공 콤플렉스를 무엇으로 극복하셨습니까?
▲ 신 : 한 마디로 몸으로 때웠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면서 몸으로 때웠습니다. 토요일, 일요일도 거의 대부분 정상출근 했지요. 이때 성실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니 주변에서 하나, 둘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안가서 환경청의 최고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박사학위 받고 기술사도 따고 다른 동료들보다 승진도 빨리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현국 ilyoseou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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