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동부그룹이다.
김준기 회장은 1944년 12월 4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김 회장은 부친이 유명한 정치인 김진만 선생으로 어릴 때부터 국가, 민족, 국익 같은 말을 무수히 들으며 자랐다. 때문에 김 회장은 정치인 집안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이 시대의 젊은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하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따라서 이런 가풍에서 자란 김 회장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정치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다른 길을 걸었고 기업을 택했다. 김 회장이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68년 군을 제대하고 고려대학 경제학과에 재학 중일 때 미국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전자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전자업계 미국 우수인재 유치단 일원으로 뽑혔다. 그는 하버드, 콜롬비아, MIT, 버클리 등의 대학과 전자업계를 돌아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국력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는 그때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발전시킨 에너지는 바로 ‘기업’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당시 즐겨 읽던 유명 기업인, 경제학, 경영학자의 책은 창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했다.
그는 “20세 초반에 100만 달러를 번 사람은 기업인으로서 일생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선박왕 오나시스 자서전의 구절을 읽고 큰 사업을 수행하는 훌륭한 기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또 카네기의 묘비명에 쓰인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부리다 간 사람 여기 누웠노라”는 글을 본 뒤 큰 기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던 중 어머니 김숙자 여사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김 회장의 결심을 재촉했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격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던 어머니를 여윈 그는 앞으로 독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정치활동에 전념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장남으로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압박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안주하던 데서 벗어나 자신이 나아가야 할 진로를 하루 빨리 확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더 이상 창업을 미룰 수 없게 했다. 결국 그때까지 준비해온 유학계획을 접고 ‘창업을 해야겠다’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창업 구상 당시 김 회장의 최대 관심사는 ‘관광’이었다. 미국 여행 당시 여러 대학과 전자업체를 방문하는 일정 틈틈이 둘러본 라스베이거스, 디즈니랜드는 김 회장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한국과 같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관광업은 외화 가득률이 높으니 평소 눈 구경을 하기 어려운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와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최고의 복합 리조트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유치하고 스키장, 경마장, 호텔, 카지노, 요트경기장 등 대규모 종합관광 레저단지를 개발하자. 또 서울을 중심으로 소양강-설악산-동해안-소금강을 연결하는 일일 관광 코스를 만들자. 특히 동해안에는 속초, 동해, 주문진 항구와 양양, 동해, 강릉 비행장이 있고, 스키장, 눈구경, 사냥터, 낚시터 등의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런 사업구상에 따라 종합광광단지를 개발하려면 우선 건설회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려면 관광회사와 운송회사를 세워야 하고 사람들이 여행경비를 쉽게 마련할 수 있도록 상호부금회사도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됐다.
하지만 당장 창업에 필요한 사업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벽에 부딪혔다. 부친은 대학에 재학 중인 젊은 아들이 사업하는 것 보다 유학을 갔다 와서 계속 공부하기를 바랐다. 결국 김 회장의 자금 지원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미 기업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이 선 상태였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시작하는 사업이었기에 김 회장은 백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친지들에게 자신의 사업구상과 계획을 밝히고 집요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결국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약 2500만 원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어려움 끝에 1969년 1월 자본금 2500만 원과 직원 2명으로 오늘의 동부그룹을 있게 한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설립하게 됐다.
미륭건설 설립
이 같은 창업과정은 김 회장과 동부그룹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건설사 창업은 주위 사람들이 반대하고 회의적으로 보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김 회장 특유의 집념으로 첫 번째 작품을 성공적으로 일궈낼 수 있었다.
“기업의 설립은 인류에 기여하는 것으로, 기업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꽃이며 에너지원이다. 기업가는 기업 활동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나는 한국 기업인들의 귀감이 되는 기업 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
미륭건설 설립 후 김 회장에게 닥친 과제는 건설 관련 면허를 취득하는 일이었다. 건설업체로서 종합토목공사를 시공하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의 시공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면허를 확보해야 했다.
김 회장은 우선 토목 면허와 건축 면허 그리고 도로포장 면허를 취득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건설업 면허 중 토목과 건축 면허는 취득하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도로포장 면허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도로포장 면허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국내의 대형 건설회사 10여 개에 불과했다. 도로포장 면허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전국에 몇 대밖에 없거나 또는 아예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포장 장비를 확보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다.
건설부 관계자들은 최근 3~4년 동안 도로포장 면허를 받은 업체가 한 군데도 없고, 면허 신청 기일도 촉박하니 이번에는 토목과 건축 면허만 신청하고 도로포장 면허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구청, 서울시청, 건설부 등 관련 부서들로부터 도장만 70여 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왕 시작하는 사업이니 처음부터 가능한 체계와 면허를 갖추고 출발하고 싶었다. 급히 수소문을 하고 전국을 뒤져 1~2대씩밖에 없거나 아예 없다고 하던 장비들을 찾아내 소유권 이전 수속을 마쳤다.
직원들을 대기시켜 담당 공무원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도록 미리 붙잡고 영업용 택시 6대를 빌렸다. 릴레이식으로 움직인 끝에 자격요건 충족에 필요한 서류와 절차를 최단시간 내에 갖춰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건설부에 찾아갔고 건설부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많은 장비들을 그 짧은 시간에 구했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이 일로 당시 건설부 관계자들 사이에는 ‘건설업계에 큰 물건이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면허를 받은 김 회장은 일감 확보를 위해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창업 초기에 구상했던 관광레저사업은 정치적인 문제가 얽히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도급 순위가 최하위인 600위 수준에 머물고 있는 동부건설로서는 정부에 발주하는 대형 공사에는 참여조차 할 수 없었다. 예산회계법상 도급한도가 낮은 업체는 큰 공사 입찰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도급 순위에 상관없이 입찰할 수 있는 민간 부문 발주공사나 주한 외국인 발주공사에 눈을 돌렸다. 공사 하나를 따내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달려들었다.
김 회장은 이때 미 육군공병단의 극동지역 사령부 공사를 극적으로 따냈다. 어려운 상황에서 따는 공사라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의를 다했다. 또한 김 회장은 대규모 민간 부문 발주 공사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정보 수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 중의 하나가 연세대학교 이공대 공사였다. 이는 독일정부가 연세대학에 100만 달러(당시 돈으로 약 4억5000만 원)를 기부함으로써 성사된 공사로, 국내 건축공사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그러나 설립된 지 불과 2년여에 지나지 않고 건축 분야에 실적이 많지 않은 동부건설이 연세대학 이공대 공사에 참여를 시도한 것은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설업체들의 수주 경쟁 또한 치열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 공사를 어떤 일이 있어도 성사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향후 기업의 진로를 가늠하는 중대한 고비이며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력을 기울여 공사 수주를 준비해나갔다. 관련 분야의 인력을 대폭 보강, 종합 적인 시공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인적 체제를 정비하고, 공사 진행을 위한 복안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김 회장은 70여 차례나 연세대학 공사 관계자들을 찾아 가서 실적은 별로 없지만 최고의 시공능력과 경험을 가진 건축기술자와 설비기술자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회사들과 달리 하청을 주지 않고 직접 시공할 것임을 강력하게 설득시켜 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경영의 神에게 배우는 1등 기업의 비밀│매일경제신문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