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일의 정치실험 재구성
18대 대통령 선거는 투표율 75.8%로 역대 선거사상 가장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한 선거였다. 높은 투표율로 야권의 승리를 점쳤던 예상과는 달리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다. 이 보고서에선 대선 패배에 대한 공통된 평가로 국민들의 생활고와 미래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 제시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문재인 전 후보의 패배를 단순히 이번 18대 대선에서의 실패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보수가 새롭게 확대 재구성된 데 반해 한국의 (범)진보는 현실정치의 벽 앞에서 얼어붙어 ‘진보의 파산’을 초래했다는 평이다.
안철수 후보의 등장과 퇴장이 이번 대선을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안 후보는 낡은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미래가치를 강조함으로써 거대한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열망을 대변해 정치권 전반을 줄곧 긴장시켰기 때문. 안철수의 정치적 도전과 실험을 평가함에 있어서 필자들은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되 안철수 내부의 문제를 주로 다루려고 노력했다.
보고서 내용을 보면 우선 안철수의 ‘대선 출마 선언’에 대한 분석이 눈에 띈다. 안철수는 지난 1년 여 동안 흐트러지지 않고 지속돼온 ‘안철수 현상’에 대해 “이제 좀 정치를 다르게 해보자. 새롭게 출발해보자”는 국민들의 뜻으로, 자신을 통한 정치쇄신의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안철수는 국민들의 이런 열망을 실천하기 위해 대선에 출마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낡은 가치와 미래가치의 충돌로 파악하고, 무엇보다 정치쇄신과 새로운 경제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언론에서 ‘단일화’문제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진정한 변화와 혁신, 국민의 동의’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한바 있다. 기성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감안한 ‘무소속’출마 뜻을 비쳤고, 대선에 패배해도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두 번째로는 안철수가 여당과 언론에 의한 네거티브 공세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다. 대선 후보로서의 안철수에 대한 ‘검증’은 정치권과 언론이 이미 벼르던 일이었다. 특히, 새누리당은 추석 직후에 예정된 국정감사를 아예 안철수 공개 검증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안철수 측은 이에 대해 무난하게 대처했고, 효과는 추석 직후 이뤄진 여론조사결과에 의해 사실상 검증됐다고 내다봤다. 아쉬운 점도 내비쳤다. 방어적 대응에 너무 치중하다가 도전자로서의 공세 전략을 펴는 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낡은 정치와 대비된 미래가치의 총아로서 강력하게 어필하길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다소 미미했다는 분석이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내용은 연속적 정책발표와 지방 순회 등을 통한 정책 경쟁에 대한 분석이다. 안철수의 10월 행보는 ‘선의의 정책 경쟁’이라는 전략적 컨셉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책 공약 내용의 차별성이 약했고, 정책 공약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방식이 기존 선거정치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더 치명적인 문제점은 ‘선의의 정책 경쟁’이 느슨하고 소극적이며 모호한 포석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안철수 단일화에 수동적
정치인이자 도전자 안철수로서의 강력한 경쟁 우위를 확보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안철수 현상에 잠재돼 있었던 도전과 변화의 대중적 에너지를 표출시키고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했다. 안철수의 정치적 경험·세력이 부족한데서 느끼는 유권자의 불안감에 전략적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이 더해졌다. 그의 정치쇄신론은 제도 개혁에 치우침으로써 경제민주화 등 민생 정치 의제가 뒤로 밀려나는 ‘의도되지 않은’ 현상을 초래했다고 평했다.
네 번째로 후보 단일화 논리에 대한 분석이다. 안철수와 문재인의 단일화 과정에서 눈여겨 볼 점은 안철수 측의 단일화 논의 수용이 상당히 수동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안타깝지만 ‘다행 중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문재인에 대한 안철수의 경쟁우위가 불확실하다는 판단이 설 때는 망설임 없이 단일화 문제를 정면 돌파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단일화는 단순히 정권교체의 목적에서가 아니라 정치쇄신과 새 정치 실천의 목적에서 바라봤어야 했다는 것.
그래야만 능동적 선택과 명료한 전략이 뒤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의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다 결국 단일화는 안철수의 후보직 사퇴와 함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혁신의 과정이 되지 못했다. 이는 안철수 측이 정치혁신과 새 정치의 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일화 노력은 그저 단일화 방식을 둘러싼 시소 게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끝으로, 후보직 사퇴에 대한 분석도 내놓았다. 안철수의 후보직 사퇴가 급반전의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혁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기대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필연적인 결말이기도 했다. 안철수의 양보에 의한 단일화라고 이해하는 것은 과정을 무시한 오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는 단일화를 주도한 파트너로서 문재인의 손을 들어줬지만, 진정한 단일화를 이루는 데 실패한 자신이 그 책임을 졌다고 적시했다.
안철수에 대한 전략적 평가
대선후보 안철수의 강점으로 이 보고서는 참신성, 기성 정치인과의 차별화된 이미지, 20~30대 젊은 세대와의 친화성 등을 들었다. 약점으로는 무소속으로 정치적 경험과 조직 부족, 빈약한 인재풀 등을 든다. 이번 대선에서 그는 도전자로서의 기상과 결단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고 ‘안철수 현상’을 안철수 정치와 융합시켜내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정치인 안철수는 대중으로부터 호명되었고 대중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가 지닌 최대의 장점은 스스로 자기변화를 만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이 점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정치인 안철수의 새로운 길에 여전히 기대감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출마선언 후 66일 간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전략적으로 기세를 잡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미래가치와 새 정치’의 비전을 중심으로 지지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전략기획과, 정당정치 혁신과 국민의 신뢰를 명분으로 민주당을 낡은 체계의 일부라며 압박해 들어가는 기획을 병행했어야 한다고 내다봤다. 이를 통해 안철수의 확실한 경쟁우위를 달성했어야 했다는 것.
또한 보고서는 안철수는 스스로 자신의 정책이념 성향을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혹은 ‘합리적 보수, 온건한 진보’라고 표현한 바 있듯이, 그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다고 밝혔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방안이었다. 낡은 체제로부터 벗어나 미래가치를 실현하자 했지만 그 의지가 안철수의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지는 못했다고 냉철하게 평했다.
이 보고서는 안철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는 정당 없이 대선을 치른다는 것이 매우 험난한 여정이라는 점이다. 창당의 시간이 없었다, 출마시기가 늦었다, 급조한 조직으로 인한 부작용이 있다 등의 변명을 하기엔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캠프와 정책포럼은 차치하고 문제는 지역 조직과 참모장급의 인력풀이었다고 토로했다. 지역포럼 형태의 자발적 네트워크가 단기간에 구축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선거조직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부적합한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직운영의 문제를 들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캠프 구성원들 간의 이질성과 팀워크 결여. 이는 지도부의 노력이 절실한 부분이었지만 단일화 국면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안철수가 새 정치의 길을 개척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정치의 문을 열어야 했다. 새 정치는 역사상 가장 엄혹한 야권 재편의 상황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안철수 스스로도 새 정치의 가시밭길을 가겠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이 보고서를 작성한 배경이자 지난 66일의 도전과 실패를 새겨 평가와 반성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안철수,“보고서 발간 알고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 전 대선 캠프 대외협력팀 구성원이었던 필자들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며 ‘한국의 진보는 진보를 멈추고 파산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안철수의 귀환으로 여야 안팎은 물론 국민들의 눈과 귀가 새로운 변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던 18대 대선, 그리고 1년 이상 지속된 ‘안철수 현상’은 이를 반증한다. ‘안철수 현상’은 무한한 것이 아닌 유효기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정치권에선 안철수가 신당 창당을 언제 할지, 그리고 그것이 성공을 거둘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새 정치 구현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안철수가 어떤 실천과 실행을 보여줄지 주목하는 배경이다.
한편 이 보고서를 책으로 출판한 것과 관련해 안철수 후보측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안철수 진심캠프에서 상황실 부실장을 맡았던 윤태곤 캠프 공보팀장은 “진심캠프 해산 이후에 대외협력 팀원들에 의해 보고서가 발행됐다는 얘기는 들었다”면서 “안 후보 또한 알고는 있지만 직접 보고를 받거나 보고서를 보내주지 않아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하승창 전 대선캠프 대외협력실장은 “보고서 발행 얘기는 알고 있었다. 일부 팀원들 간에 토론에서 나온 내용들로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안은혜 기자 iamgrac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