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 자금 회수 어렵다” 결국 보이는 지하경제만 타깃
‘현금거래’에 엄격한 잣대…복지와 상충되는 아이러니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목표와 취지엔 모두가 공감하지만 불법 사금융이나 도박·마약 등 불법적인 경로로 형성된 검은돈보다 저소득 자영업자들이 주된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정작 지하경제의 큰 규모는 국외에서 상속을 한다든지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는 거래에서 발생하기 마련인데, 길거리 컵밥 노점상·영세 자영업자 등에게까지 현금거래에 대한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복지와 상충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생계를 잃고 거리로 내쫓긴 노점상인들도 있다.
“복지도 좋지만, 나 좀 먹고 살게해달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인근에서 강제철거로 생계를 잃었다는 영세 자엽업자 A씨(39)의 하소연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지하경제 양성화’바람이 오히려 노점상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A씨는 “동대문에서 노점을 운영한다 해도 이곳에 형성된 룰에 따른다.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나 혼자 살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오랜시간 이곳 나름의 문화에 적용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최근 동대문구청에서 나와 강제철거를 당했다. ‘노점'이란 이유만으로 난 내 생계터전을 잃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현 정권의 세수 확보 의지가 강한만큼 노점상들의 단속도 심해졌다는 것이다.
노량진역 인근 노점상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량진역' 하면 지난해 말까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각종 입시 학원과 ‘컵밥'이다. 지난 연말 노량진역에서 내려 제일 먼저 보이는 육교를 지나면 학생들이 거리 위의 노점상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학생들에게 컵밥으로 대표되는 노량진의 노점상은 짧은 시간, 저렴하고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다시 들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편리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점상의 컵밥은 획기적으로 식사시간을 단축시키면서도 값싸게 먹을 수 있어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고, 이를 판매하는 노점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됐다.
컵밥의 인기는 하나의 ‘문화 아닌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노량진의 명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런 노점상들에겐 문제가 있었다. ‘노점'이기에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을 해왔다는 것. 허가가 없었기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단속을 해도 매출 관련 서류가 없어 이들에 대한 법적제지는 어려웠다. 결국 이듬해 동작구청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했다.
동작구청 관계자는 “수차례 자진철거를 요청했지만 노점 측에서 아무런 개선 노력을 보이지 않아 불가피하게 강제집행했다"고 밝혔다.
불법이라는 명분이었지만 결국 노점상인들의 생존권을 강제로 빼앗은 셈이 됐다. 공교롭게도 이 자리엔 대기업이 운영하는 컵밥 전문점이 들어섰다. 과거 줄서서 기다리다 먹고 가던 학생들의 모습은 이제 한때의 추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과세되지 않는 경제행위도 모두 포함
약 370조 원으로 추정되는 지하경제의 개념이 밀수나 도박 같은 불법 활동뿐 아니라 과세되지 않는 모든 경제 행위를 포함하다보니, 복지 공약 실천을 위해 135조 원을 마련해야 하는 세무당국이 영세상인 같은 쉬운 타깃만 공략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반면 조세피난처에 대한 수사는 답보상태다. 일부 규모를 파악했다 해도 그 돈의 주인을 찾지 못해 세금징수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 등에 따르면 1968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조세피난처 35곳에 내국인이 투자한 금액은 총 210억 달러(약 24조7800억 원)에 달한다.
투자 대상지로는 싱가포르가 43억 달러(약 4조6600억 원)로 가장 많았고 말레이시아와 케이만군도가 각각 31억 달러(약 3조3700억 원), 버뮤다 26억 달러(약 2조9000억 원), 필리핀 25억 달러(약 2조8000억 원) 등이다. 이 기간 우리나라 대외투자 총액이 1966억 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전체 대외 투자액의 10.7%가 조세피난처에 집중된 셈이다.
또한 관세청 집계에 따르면 2011년까지 조세피난처에 등록된 국내 기업의 페이퍼컴퍼니는 4875개다. 대기업 전문 분석 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세피난처로 지목한 44개 국가 또는 지역에 국내 30대 재벌그룹이 세운 외국법인은 47개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통계를 통한 세금징수는 미흡하다.
지난 18일 관련부처에 따르면 국세청은 2011년 역외탈세 조사로 9000여억 원의 탈루세금을 추징했고, 지난해 상반기에도 105건, 4897억 원가량을 추징한 바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새로운 수뇌부 취임 이후에도 역외탈세 적발 강화를 위한 기조는 더 강조될 것”이라며 “전 세계적인 세정방향의 큰 흐름이고 모두가 공감하고 있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앞서 김덕중 국세청장 후보자는 지난 15일 “무엇보다 새 정부 국정과제인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국세수입을 확보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해 국세 행정력을 집중할 계획임을 내비쳤다.
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형태만 변경돼 현 정권 내내 퍼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재계 전문가는 “눈 먼 돈도 때로는 경제를 만든다. 음지의 돈이 양지로 올라오는 순간 득이 있는 만큼 실도 많아진다"며 “지하경제 양성화가 무조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기초연금 확대, 4대 중증질환 국가 부담 등 복지 공약 실천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증세 대신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복지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공약을 전했다. 이를 위해 지난 1월 10일 발표된 산업연구원의 ‘가짜석유시장 규모 및 탈루세액 추정’ 보고서에 근거해 가짜석유 단속에 나서기로 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가짜석유 유통으로 인한 세금 탈루액은 1조727억 원으로 추산된다. 또한 새해 첫날 통과된 2013년 정부 예산안에는 가짜석유 유통을 줄일 수 있는 ‘석유수급 보고 전산화 시스템’ 예산 65억 원도 책정돼 있다.
가짜석유 제조업자들은 진짜석유에 벤젠·톨루엔 등을 섞어 농도를 낮춰 마치 전체 석유의 양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차익을 남긴 뒤, 차익에 대한 소득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