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이 구속되고 수사는 종결되었으나 스캔들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야당은 정인숙 스캔들을 부도덕한 정권의 추한 이면이라고 비난했다.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자 신민당 국회의원인 조윤형은 5월 19일 국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박정희 정권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수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갖다가 어떻게 변절해서 노래를 부르는고 하니….”
조윤형은 국회 마이크 앞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 할 것 같으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미스터 정’은 정일권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윤형이 노래를 부르자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왁자하게 웃고 공화당 의원들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나훈아라는 신인가수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노래였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조윤형이 이 노래를 개사한 노래를 국회에서 부를 정도로 숱한 화제를 뿌렸으나 의혹만 커진 채 사건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정인숙 사건은 오랫동안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1970년에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해 대통령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부도덕한 일을 벌인 것이 발각된다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정인숙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정인숙의 남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둘러 이 사건을 베일로 가렸다.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절대권력을 갖고 있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로 이어진다. 제3공화국은 경제발전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부패한 독재정권이었다. 부패한 정권에는 돈과 여자가 따른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요정문화가 휩쓸고 있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요정에서 밀담을 나누고, 요정에서 정치하는 것을 풍류로 생각했다.
요정에는 술을 따르고 가무를 접대하는 기생들이 있다. 이들은 미모와 학식을 갖추고 있다. 1970년대의 한국 요정은 오진암·삼청각·대원각·옥류장·선운각 등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진암은 사토 일본수상도 찾은 곳이고, 남북적십자회담 때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들도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식사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술과 기생이 있는 밤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빈들이 방문할 때도 요정에서 접대를 했다.
밤에 피는 장미? 밤에 피는 악의 꽃!
기생들은 밤에 가무를 하면서 정치인들을 접대했다. 대원각에서 오래 일했던 한 기생은 자유당 정권의 정치인은 현금을 뿌렸는데, 5·16이 일어난 뒤의 주체 세력은 보증수표를 뿌렸다고 진술했다.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뀐 대원각에는 그 당시 약 100명에 가까운 기생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오후 4시가 되면 택시를 타고 성북동 골짜기에 있는 대원각으로 올라왔다. 출근할 때는 양장을 하지만 대기실에서 한복으로 갈아입는다. 화장하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에는 손님들이 올 때까지 골짜기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내려앉는 골짜기에서 색색의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꽃이 핀 것 같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도 꽃향기에 취하면 정신을 잃게 마련이다. 김만중의 ‘구운몽’에서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인 성진(性眞)은 팔선녀의 미모에 취하고 말았는데, 미모와 학식을 갖춘 젊은 여성이 눈웃음을 치면서 술을 따르니 정치인들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요정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요정에서 적당히 술을 마신 뒤에 통행금지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거나 호텔로 간다. 이것이 요정문화고 기생들의 밤이다.
요정에서 하룻밤 술을 마시려면 1970년 기준으로 몇 만 원의 돈이 필요했다. 당시 최고급 담배인 청자가 150원, 대기업 직원의 월급이 2만 원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일반인들은 요정을 꿈도 꿀 수 없었다.
요정은 기생들로 인해 돈을 벌어들였다. 음식값이나 유흥비가 비싼 이런 요정에 일반인들이 자주 찾아갈 수는 없다. 이런 곳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재벌이나 정치인뿐이었다.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들도 요정의 기생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훗날 대선에 출마했을 때 이들과 관계를 한 기생들이 낳은 자식이 아무개의 자식이라는 말이 퍼져서 한국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요정의 기생들은 국익(?)에도 한몫했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일본 기업이 한국에 진출하고 일본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후 복구에 성공해 선진국이 된 일본인들은 한국으로 기생 관광을 왔다. 이들은 요정에 들어갈 때도 줄을 서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줄을 서서 나왔다. 대원각과 같은 요정에서는 일본인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기생 관광을 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정신대 문제로 한국인들에게 굴욕과 수치심을 주었던 일본인들은 기생 관광으로 또 한 번 모멸감을 안긴 것이다.
정인숙은 선운각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선운각에서 만난 한 정치인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고 조용히 살았으면 비명에 죽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콜걸이 돼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전전했다. 오빠가 운전하는 차에서 미국인과 키스하기도 했다. 그 돈으로 부유하게 살고 오빠에게 한 달에 2만 원씩 월급을 줬다. 가족들은 그녀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1970년대의 군사문화가 피운 밤의 꽃이었다.
그녀는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일본과 미국에 한동안 외유 형태로 나가 있기도 했다. 정인숙이 살해되기 6개월 전에 군사정권은 여론을 무시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는 야당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의 핵심인사들과 관계된 정인숙은 암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국무총리실 등은 그녀를 일본과 미국 등에 내보낸 것이다. 결국 미국에서 갑자기 귀국한 그녀는 한강로에서 살해됐다.
자신의 친동생을 살해했다고 자백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종욱은 1989년 5월 11일에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1970년에 수감됐으니 장장 19년 만의 일이다.
“나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20년 동안이나 복역했어”
정종욱은 출감을 하자 정인숙을 살해한 인물이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으로서 나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범인은 정종욱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만은 확고부동해”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옥경석 형사의 진술이다.
사건의 열쇠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쥐고 있다. 정인숙은 세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정승일로 지었는데 훗날 개명해 정성일이 되었다. 정성일은 1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해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낸 뒤에 한 달 만에 취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정성일은 2001년에 신용카드 도용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고 2005년에 강재추방돼 귀국했다. 그리고 2007년에는 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성일이는 정일권이 친아버지임을 확인했다. 아버지인 정일권을 살려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소를 취하했다.”
정종욱의 말이다.
정일권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정성일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고 정종욱의 면담도 거절했다. 결국 정인숙 살인사건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추정할 수 있지만 미스터리로 남게 된 것이다. <끝>
* 위 내용은 <대한민국 12비사>(이수광 저, 일상과이상 간)의 일부 내용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책 속에 있습니다.
이수광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