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금호아시아나]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3-19 09:48
  • 승인 2013.03.19 09:48
  • 호수 985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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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두 대로 일군 사업… ‘형제경영’ 빛내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공격경영을 자랑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박인천 창업주
창업주 박인천은 1901년 7월 5일 전남 나주군 다시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재곤이다. 어머니는 박인천을 낳으면서 밤새 둥둥 거리는 북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큰 북소리는 박인천이 태어나자마자 그쳤는데 사람들은 이 일을 큰 인물이 날 징조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박인천의 아버지는 그가 7세 때 마을에 돌던 전염병으로 4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짚신이 아까워 150리 길을 맨발로 걸을 정도로 모질고 악착같이 살았다.

박인천은 어린시절 고집이 세고 남에게 지기 싫어해 걸핏하면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곤 했다. 그런 그를 동네 사람들은 ‘성질이 사납고 힘이 센 소’를 뜻하는 꺼럭배기 소라고 불렀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말을 듣지 않아 쓸모없는 소가 꺼럭배기 소였다. 보다 못한 박인천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되던 해 이웃마을인 후석리의 안곡서당으로 데리고 갔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으나 총명해 열다섯 살에 강경대회(인근 서당에서 뽑혀온 학생들이 누가 더 경을 잘 외는지 겨루는 시합)에서 장원을 했다.

이후 17세에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인 교장을 몰아내기 위한 연판장을 돌리다가 퇴학당했다. 그뒤 장사에 꿈을 두고 고리대금업을 시작했으나 빌려준 돈을 인정 때문에 차압하지 못해 결국 그만뒀다. 1923년 5월, 성공의 꿈을 안고 일본 오사카로 향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무력감만 느낀 채 귀국했다.

집념의 사나이로 거듭나

돈을 벌러 일본으로 갔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배의 갑판 위, 그는 자신의 조급성과 끈기 없음을 책망하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다. 갑판 난간의 쇠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던 순간 어떤 이가 그의 앞에 보따리를 떨어트렸다. 주워보니 수백 원은 족히 될 거금으로, 당시의 가치로 따지면 그의 팔자를 고칠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그가 돈을 주워 숨기려던 차에 보따리의 주인이 나타나 울부짖었다. 그는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었고 돈을 줍고 바다에 뛰어들려던 마음을 금세 접어버린 자신을 되돌아봤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쉽게 포기하고 끈기가 없던 그가 ‘집념의 사나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고향에 돌아가 다시 인생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공직의 꿈을 품고 공부를 시작해 순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보통문관(오늘날의 고시) 시험에 도전, 5년만에 합격해 순사부장으로 진급했다.

옷 벗고 꿈 찾아 나서

일제 치하에서 순사부장으로 근무하면서도 창씨개명과 동조동근(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에서 났다는 사상)에 반대하는 박인천에게 일본인 서장은 늘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결국 경찰직을 그만둔 박인천은 어린 시절부터 소원했던 창업의 꿈을 다시 펼칠 결심을 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양약 장사를 통해 번 5000원과 추가 자본금으로 택시 두 대를 사들인 그는 ‘광주택시’라는 간판을 내걸고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수완이 있었던 박인천은 2년여의 짧은 기간에 자본을 축적해 1948년 광주여객을 세웠고,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해 여객 운송의 토대를 굳건히 세웠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회갑연, 결혼식 등 집안 행사 때 광주택시를 대절해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길 정도로 광주택시는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것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전쟁 와중에도 도처에서 부서진 차체들을 모아 같은 해 10월 말 목탄차 2대를 조립했다. 이후 박인천은 목탄차를 휘발유차로 바꾸고 휘발유를 다시 또 디젤엔진차로 교체해 가며 사세를 확장했다. 1952년 광주여객의 버스 보유 대수는 46대에 이르렀으며 노선은 광주에서 영산포와 해남까지 확장됐다. 당시 100명 가까이 되던 직원들은 일이 정신없이 바빠 ‘비빔밥에 물 말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비빔밥을 먹으려 밥을 비벼놓았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면 물을 부어서 후루룩 마셔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뜻이었다.

일이 바쁘니 돈은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하루 매출이 수백만 원에 달하던 그를 사람들은 ‘먼지부자’라고 불렀다. 광주도로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돈을 번 박인천이 매일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는다는 얘기가 광주 전역에 돌았다.

금호그룹의 기틀 마련

1950년대에 광주여객은 전라남도 최대의 여객운송업체로 떠올랐다. 이후 박인천 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은 지인을 돕기 위해 나주정미소를 인수했다. 이후 매년 적자를 내고 있는 전남제사 역시 인수해 헌신적인 노력과 집념으로 회사를 정상화 시켰다.

이후 여객사업은 승승장구 했으나 타이어 수입량이 격감해 타이어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금호는 타이어산업에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타당성 조사나 업계 수요 조사 등 검토단계 없이 설립된 금호타이어는 어려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전남 제사가 사용하던 창고를 개조해 1960년 타이어공장 건설에 착수해 1961년 4월부터 하루 20분 정도 타이어를 생산했지만 기술도 한참 부족한데다가 생산환경도 열악해 시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호박타이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설비 개량과 생산규격 개발 등의 노력으로 1966년 KS마크를 획득, 결실을 맛봤다.

지주회사 ‘금호실업’ 설립

1972년 어느 날, 박인천은 당시 서강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장남 故 박성용에게 지주회사 설립 건의를 받는다. 경영효율성을 위해 계열사를 통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는 게 지주회사 설립 주장의 이유였다. 박인천은 당시 경영진들과 의견을 모아 지주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같은 해 10월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박인천을 비롯한 장남 박성용 박사 등 7명을 발기인으로 해 지주회사인 ‘금호실업’ 설립을 결의했다.

금호실업은 박인천의 아호인 금호를 따 이름 지었으며, 지주회사인 동시에 해외수출을 총괄하는 종합무역상사, 국내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종합물산회사라는 세 가지 목적으로 다음 날 정식 출범했다. 지주회사 설립을 주장했던 박인천의 장남 박성용은 금호실업 부사장으로 발탁돼 그룹 체제 출범을 진두지휘했다.

박인천은 다음 해 1월 금호실업 회장으로 취임해 정식으로 그룹의 출범을 알렸다. 금호실업은 그해 1월부터 3월까지 금호타이어,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전남제사, 한국합성고무(현 금호석유화학)에 대해 해당주식을 인수함으로써 지주회사의 틀을 갖췄다. 금호실업은 또한 계열사 통합관리를 위해 투자사업부도 설치했다. 투자사업부는 신규사업 추진, 그룹 공채사원 모집과 교육 등 인력관리, 경영실적 평가 등을 수행했다. 1973년 그룹 출범 당시 6개에 불과했던 계열사는 금융·철강·전기업·섬유·건설업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4년 후인 1977년, 총 12개로 늘어났다.

박인천이 17만 원의 자금으로 택시 두 대로 마련해 시작했던 광주택시는 60여 년 만에 계열사 48개, 자산 총액 37조5587억 원, 매출액 26조 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공정 거래위원회 발표 기준으로 재계 서열 8위로 임직원수는 4만4000명에 이른다.

박인천은 기업을 자식들에게 넘기며 형제(성용, 정구, 삼구, 찬구)간 합의 아래 회장을 선임하고 주요 사안에 대해서도 4자 합의를 우선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두터운 형제간의 우애가 바탕이 된 금호그룹의 ‘형제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형제가 키워낸 그룹

젊은 시절 유학길에 올랐다 1968년 귀국해 대통령 경제비서관, 경제기획원 장관 특보 등 공직생활을 거친 장남 박 명예회장은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그룹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1972년 당시 지주회사 격이었던 금호실업 부사장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뛰어들었다. 1984년 박인천 회장이 서거하자 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해 ‘학자풍의 전문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 명예회장은 당시 경기불황과 삼양타이어 분리파문 등으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자 취임 당시 9개사였던 계열사를 4개로 줄이든 등 ‘경영합리화’를 선언하고, 제2 창업 시대를 열었다. 1988년에는 건실한 재무구조와 운송사업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제2 민항 사업자로 선정되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 아시아나항공을 출범시켜 금호아시아나를 10대 그룹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그의 작품이다.

박 명예회장은 1993년부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동생 故 박정구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겠다는 뜻을 밝혔고 65세가 되던 해 1996년 그룹 창사 50주년을 맞아 동생 정구 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줬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경영의 神에게 배우는 1등 기업의 비밀│매일경제신문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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