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 같지 않구나.’
도준호 기자는 정인숙의 아름다운 얼굴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기자들은 정인숙의 사진을 찍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녀가 한때 선운각을 출입하던 호스티스고 정관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이 취재 과정에서 속속 밝혀졌다.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해 권력의 핵심인사들의 정부(情婦)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정인숙의 수첩도 화제가 되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수첩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등 실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검찰은 공안부에 사건을 배정해 직접 수사에 나섰다.
정인숙은 호스티스이면서 콜걸이었다. 아버지는 대구 부시장을 지냈고 그녀 자신은 대구 신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서울문리사대(현 명지대 국문과)를 1년 동안 다닌 뒤에 중퇴했다. 정인숙은 이때부터 학사기생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결국 직업여성의 길로 빠졌다. 오늘날에 ‘여대생 휴게텔’이나 ‘여대생 키스방’이 유행하듯 ‘학사기생’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행했다. 그녀들은 대학생이면서 요정에 출입해 기생 노릇을 하는 여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단순한 기생에 만족하지 않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마련이다. 남자들이 여대생 기생들을 좋아하자 요정 등에서 여대생들을 기생으로 뽑았다. 이러한 풍속은 <학사와 기생>이라는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정인숙은 학사기생들과 어울리다가 기생이 되었다. 학사기생의 공통점은 자신이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정인숙도 돈을 벌어 가족들을 돕고 있었다.
정인숙은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미인을 찾아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녀의 명성이 높아져 고위 관리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비밀요정이라는 데는 안 나간 데가 없었고 서울에 있는 고급 호텔에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이 남자는 이 ‘호텔’ 저 남자는 저 ‘호텔’ 하는 식으로 따로 정해져 있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도 뒷자리에서 미국인과 키스하기까지 했다.
경찰이 친오빠인 정종욱을 진범으로 지목하고 구속했을 때, 정종욱이 기자들과 1문1답을 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7일 만인 3월 23일에 수사를 종결하면서 범인을 친오빠 정종욱이라고 발표했다.
친오빠가 여동생을 살해했다고?
시민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찰의 발표는 어딘지 모르게 궁색해 보였다. 이날 신문기사는 ‘방탕한 누이… 멸시받고 분격’, ‘단독… 배후 없다 경찰 발표’로 타이틀을 붙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99시간인 22일 새벽 2시쯤 세브란스병원 339호실에서 입원 중인 정씨를 임상 심문한 결과 ‘평소 방종한 생활을 하는 귀여운 여동생에게 몇 번 충고했으나 오히려 멸시를 받은 데다 임신 7개월의 부인과 생활해 나갈 수 없어서 범행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이날 사건을 지휘해온 서울지검 최대현 부장검사가 마포경찰서 서장실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오직 정종욱의 단독범행이며 배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경찰은 발표를 하면서 배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항간에 그녀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은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어려서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콜걸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증오감을 품어왔다.”
정종욱이 주장했다. 정종욱은 동생 정인숙에게 한 달에 2만 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인숙은 1970년대 초반에 고급 승용차인 코로나를 자가용으로 굴리고 있었다. 게다가 친오빠를 운전수로 고용했다. 그러나 오빠와 잦은 마찰이 있었다. 차가 쉴 때에 오빠가 자가용으로 영업해 돈을 버는 것이 못마땅해서 월급 2만 원을 주는 것도 아까워했다.
정종욱은 정인숙에게 문란한 남자관계를 그만두라고 여러 차례 권고했는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죽였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자백을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인숙의 스캔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정인숙에 대한 이야기는 육영수에게도 들어갔고 육영수는 박정희를 추궁했다. 박정희는 정인숙사건으로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김정렴 비서실장을 불러서 격노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비서실장은 대체 뭐 하는 거요? 권총 맞아 죽은 여자의 아이가 내 아이라는 소문이 나돈다는데 왜 나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거요?”
박정희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각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김정렴 비서실장이 당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관련이 없다니…. 시중에 이런 노래가 나돈대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인가’ 뭔가를 개사하여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박이라고 말하겠어요’ 뭐 이런 노래가 나돈다는데 상관이 없어? 나는 그 여자를 본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듣고 임자는 보고조차 하지 않은 거야? 설마 당신도 나를 의심한 거야?”
“아, 아닙니다.”
“어젯밤에 우리 집사람이 나를 얼마나 비난했는지 알아요? 내가 이런 일로 집사람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돼?”
박정희는 좀처럼 노기를 풀지 않았다. 김정렴은 사건의 실상을 자세히 보고했다.
“당신, 비서실장을 왜 하고 있는 거야?”
박정희의 호통에 김정렴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래도 노기가 풀리지 않은 박정희는 신직수 검찰총장을 불러 추궁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당연히 각하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신직수는 박정희에게 아이의 아버지 이름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하고는 관계가 없고 제3자의 아이였어요.”
김정렴이 훗날 기자들에게 술회했다. 박정희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불러 추궁했다.
그러자 정일권은 김종필이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라고 보고했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불려가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크게 화가 난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항의했다. 안 그래도 3선 개헌을 하면서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후락과 김형욱으로부터 견제도 심하게 받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명색이 총리를 지낸 사람이야. 그런데도 우리 집 카펫을 모조리 뒤질 정도로 나에게 감시가 심했어. 내가 어떻게 부정부패를 할 수가 있겠어.”
1980년대에 부정부패 논란이 일자 자신은 2인자라는 사실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항변한 김종필의 말이다. 그런데 정인숙과 같은 여자에게 아이를 낳게 했으면 중앙정보부가 몰랐겠느냐는 항변이다.
“총리가 그랬어. 임자가 그런 짓을 했다고….”
박정희의 말에 김종필은 정일권을 찾아가 따졌다.
“미안합니다. 각하가 대노해 추궁하시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일권이 김종필에게 머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렇다면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일까?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힘깨나 쓴 인물임에 분명하다. 세월이 지나 2000년 MBC TV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정종욱은 정인숙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무총리실에서 심부름을 왔다는 사람에게 정인숙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무총리인 정일권이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일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 위 내용은 <대한민국 12비사>(이수광 저, 일상과이상 간)의 일부 내용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책 속에 있습니다.
이수광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