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경영 외치며 뒤로는 쥐어짜는 대기업 많아
오해 소지 경영진 대거 퇴진 …후계자 보호령까지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재계가 ‘정부 및 정치권 눈치보기’에 혈안이 돼 있다. ‘착한기업 콤플렉스’라는 신종어가 생겼을 정도다. 사회환원을 하고 정규직 직원수를 늘리는 기업이 느는가 하면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지정된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지분을 매각하고 있다. 이전 정부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 속내에 또 다른 이유가 잠재할 것이란 주장이다.
일부 시민단체도 그동안 정부규제에 꼼짝 않던 대기업들의 최근 행보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며 입을 모은다.
‘착한 기업의 불편한 진실’의 저자 김민조 씨는 “착한 기업의 이미지로 부정부패의 얼룩을 세탁하거나 반기업 정서를 완화하려는 ‘착한척’하는 기업들도 독버섯처럼 숨어있다”고 자신의 책을 통해 주장했다. 실제 대기업들은 최근 세계 경기 불황에 따른 대응 시나리오 점검과 투자계획 검토보다는 사회공헌활동이나 정규직 전환 등의 정치적 사안을 우선순위로 놓고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이 경쟁력 강화보다 좋은 기업 이미지 구축에만 힘쓰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이어진다.
롯데그룹 총수 일가가 대표적인 일감 몰아주기 사례로 꼽혀온 영화관 매점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롯데쇼핑 시네마사업본부는 다음 달부터 영화관 매점사업을 운영해 온 유원실업과 시네마유통 등 세 개 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고, 모든 매장을 직영으로 전환한다.
코오롱도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된 빵집사업에서 철수한다. 이웅렬 회장이 보유한 스위티밀 지분 19.97%를 그룹이 운영하는 비영리 장학재단 ‘꽃과어린왕자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비상장사인 스위티밀은 코오롱 본사와 압구정동, 삼성동 등에서 베이커리 전문점 ‘비어드 파파'를 운영해 왔다.
서민물가의 최대 주범인 원자재 기업들의 인하소식도 이어졌다.
CJ제일제당은 지난 5일부터 설탕 출고가를 인하했다. 하얀 설탕 1㎏은 출고가가 1363원에서 1308원으로 4%, 15㎏은 1만7656원에서 1만6597원으로 6% 내렸다.
현대차도 중대형 5대 인기차종 상위모델의 가격을 인하했다. 물가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도 물꼬가 터지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146개 점포의 상품 진열을 담당해 온 하도급 인력 1만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키로 결정했다. 정규직 전환으로 연간 600억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됨에도 이마트는 이 정책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앞서 한화그룹도 정규직 훈풍을 알린 바 있다. 한화그룹은 지난달 1일 비정규직 직원 19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땜질식 처방 논란
대기업의 정책변화에 치솟던 서민물가와 서민경제는 안정세로 돌아서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물가 상승과 비정규직 문제에 별다른 움직임 없던 재계가 현 정권 초반 앞다퉈 해결책을 강구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이 때문에 그 속내를 파헤치려는 움직임도 상당하다. 대기업들의 이 같은 조치에 ‘비정규직 문제'를 직시한 결과라기 보다 사회 분위기 및 새정부의 직간접적인 압박에 대한 ‘땜질식 처방'이라는 시각이 짙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것.
정황상 업체별 자발적인 시도라기보다는 대기업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압박과 비정규직 고용의 불법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 그룹 오너의 구속 등 외부요인들과 무관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장하나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 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열린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마트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마치 본인들이 사회적 문제 해결을 선도한다며 자화자찬하는 식으로 이런 내용을 공개한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박 정부 출범 후 대기업들이 후계자들의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뚜렷해 지면서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승진 후 열린 최근 이사회에서 등기이사를 맡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빠졌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오너는 아니지만 막강한 경영권을 휘둘러온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들은 모두 최근 정권 교체기에 경제민주화란 세찬 바람이 불면서 주목받는 인물이란 공통점이 있는데다 재계에선 등기이사를 맡지 않고서도 실질적인 경영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혹시나 모를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등기이사는 이사회에 참석해 업무집행의 의사결정, 주주총회 소집, 중요 자산의 처분과 양도, 대규모의 차입 등 경영상 주요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등기이사를 맡지 않은 것은 책임경영을 회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지적이다. 이 때문에 최근 불고있는 재계 훈풍은 또 다른 후풍이 예견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취임식에서 “임기 내 반드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도록 최대한 힘쓰겠다"고 밝혔다. 업계는 박 대통령의 의지를 고려할 때 새 정부 내내 파견 근로자들의 정규직화 바람이 거세게 불 것으로 내다봤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