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대림]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3-11 10:57
  • 승인 2013.03.11 10:57
  • 호수 984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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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업의 ‘맏형’…건설 새 역사 썼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열한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건설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대림산업이다.

2010년 창립 71주년을 맞은 대림산업은 시공순위 5위의 종합건설 회사로, 1962년 건설업체 시공능력평가제도가 생긴 이래 48년 연속 10대 건설사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또한 대림산업은 국내 건설사로는 유일하게 1955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100대 기업에 지속적으로 올라와 있는 기업 중 하나다.

1939년 부림상회로 출발

대림산업은 1939년 10월 인천 부평역 앞에서 ‘부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건설 자재 판매회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1947년 대림산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진출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복구사업,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 1970~80년대 중동신화와 중화학공업 개발사업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특히 경인·경부·호남고속도로에서부터 서울지하철·포항제철·세종문화회관·국회의사당·잠실 올림픽 주경기장·독립기념관· 한국은행·청계천 복원·광화문광장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곳곳에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대한민국 건설의 한 주축을 이루었다.

대림산업은 창업 당시 자본금 3만 원과 7명의 종업원으로 출발해 1947년 50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9년 말 기준 대림산업의 임직원은 3273명, 매출액은 6조2748억 원으로 창립 초기에 비해 직원 수는 약 470배, 매출은 2억 배 이상 늘어났다. 현재 대림산업은 대림자동차, 대림코퍼레이션, 고려개발, 여천 NCC 등 12개의 관계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2009년 말 기준으로 관계사 합계 16조3977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대림은 1966년 1월 미 해군시설처에서 발주한 베트남의 라치기아 항만 항타 공사를 87만7000달러에 수주하고, 같은 해 2월 초에 공사 착수금 4만5000달러를 한국은행에 송금함으로써 ‘해외 건설 외화 획득 1호’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73년 11월 사우디에 지점을 설치하고 아람코사가 발주한 정유공장 보일러 설치공사를 도급금액 16만 달러에 수주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중동 진출’에 성공, ‘해외 플랜트 수출 1호’라는 쾌거를 동시에 달성하기도 했다.

1975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정유공장 건설공사를 수주할 당시, 아프리카 진출 1호라는 기록도 달성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대림산업은 사우디·이란·쿠웨이트·UAE·중국·인도·태국·필리핀을 포함한 24개국에서 플랜트 수출·댐·도로·항만·공공주택 등 다채로운 해외건설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대림의 시대를 맞이하다

일제의 철저한 통제경제와 식민정책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던 1939년. 창업주 수암(修巖)이재준 회장은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로 지금의 부평역 앞에서 ‘부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는 오늘날 대림 그룹의 시초가 됐다.

부림 상회가 첫발을 내디뎠던 부평의 당시 모습은 주위가 온통 전답뿐인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이 회장이 시작했던 첫 사업은 석회 및 철물, 건자재 등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부평의 모습만큼이나 썰렁했다. 온전한 사업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이 회장에게 거짓말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부림상회를 열었던 부평 땅이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기회의 땅이 될 것임을 그는 짐작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농지를 박탈당한 농민들과 유랑민들이 노동품을 팔 요량으로 부평으로 모여 들었고, 그로 인해 때 아닌 개발 붐을 맞게된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서울 신촌에 사택을 직접 신축하고 부천에 일반 주택 4동을 지어 파는 주택사업의 첫 경험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순조로운 일이 아니었다. 건설업체의 난립과 미군정 종식으로 인한 미군 공사의 중단, 그리고 전쟁까지 일어났다. 이 회장은 부산을 피난지로 택했다. 전쟁의 상처가 그렇듯 피난지 부산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지만 그곳에서 흩어졌던 40~50명의 대림 가족들이 모이게 됐다. 그리고 당연한 일인 듯 그들을 그곳에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그때까지 해왔던 목재업 때문에 목재를 구입해 넣을 수 있었고, 건설업을 시작했던지라 공사를 할 수 있어 집단수용소를 짓는 공사부터 시작했다.

아울러 전쟁 후 복구공사가 시작되면서 건설업은 호황을 맞게 되고, 이 회장의 대림 역시 이 기류에 편승했다. 특히 1960년대의 대림은 성장의 시대였다. 한국 최초로 태국, 베트남 등 해외 건설공사 진출은 물론, 경부 고속도로, 청계천 복개공사, 여수와 울산의 석유화학 및 비료 공장 등의 영향으로 마침내 국내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까지 오르게 됐다.

‘정직·성실·신용’ 강조

이 회장이 생전에 측근들 또는 경영회의 중에 한마디씩 거들던 연설은 어느 것이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절도 있게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언설(言說)일 것이다. 특히 이 회장은 평생 사업경영의 기본 요건으로 ‘정직’과 ‘성실’, 그리고 ‘신용’을 강조했다.

부친이 늘 그에게 “사람은 널리 사귀되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사람 됨됨이를 보는 안목이야말로 기업 성패의 관건이다” 등 상인이 갖춰야 할 자질을 익히도록 독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이 회장은 사람을 바로 쓰기 위해 공정한 인사를 철칙으로 삼았다. 거래에 있어서도 정실이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3공화국 시절, 청와대로부터 들어온 인사청탁을 고심 끝에 물리쳤던 일화일 것이다. 훗날 이 회장은 “내가 사장이었다면 몰라도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할 입장에서 인사청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더욱이 6.25전쟁으로 피폐했던 당시 대림산업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토목공사인 염전사업을 수행할 때도 신뢰를 생명으로 여기고 난관을 돌파했다.

당시 소금생산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소금은 해방되던 해부터 대책을 따로 만들어야 할 만큼 시급히 공급해야 할 품목이었다. 그래서 마카오, 북미 등지에서 한 해 약 18만 톤(t)씩을 수입했지만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파동’을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염전 개발을 서둘렀다.

대림산업이 조성하던 반월염전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사리와 갯골을 건너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를 연결하는 길이 약 3km의 제방을 막아 염전으로 조성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중장비가 귀해 순전히 인력으로 끌고 미는 토차(土車)와 지게를 이용한 공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착공 1년 만인 1952년 여름, 제방축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큰 장마 끝 백중사리의 거센 물길에 최종 물막이 제방 약 350m가 유실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진상조사가 벌어지는 수난 속에 이 회장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현장 안내를 맡으며 천재지변임을 입증하고 재시공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런 진통 끝에 1954년 축조 공사를 마무리하고 그 이후로도 잡공사 등을 거쳐 무려 8년만인 1960년 4월 말 최종 준공을 하게 됐다. 이런 진통 끝에 1954년 축조공사를 마무리하고 그 이후로도 잡공사 등을 거쳐 무려 8년만인 1960년 4월 말 최종 준공을 하게 됐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란에 진출해 있던 건설업체들은 대부분 철수했다. 대림산업이 ‘캉간 가스정제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할 당시였다. 하지만 대림만은 남아서 공사를 수행했다. 발주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위험을 무렵쓴 대림의 노력은 허사였다. 전쟁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공군기의 폭격이 대규모 인명피해와 함께 완공을 앞두고 있던 플랜트 공장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대림은 이런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1990년 8월 프로젝트를 완수해 냈다. 이런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이란 정부로부터 ‘피를 나눈 형제’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건설 파트너’로 인정받게 됐다. 또한 국내 건설업체 가운데 이란에서 가장 많은 실적인 26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소득도 안게 됐다. 금액 규모로는 50억 달러에 달한다.

이로써 캉간 가스정제공장 프로젝트는 대림 7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세계 유수의 발주처 관계자들에게는 대림의 ‘무한신뢰’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회장이 강조한 신뢰를 지킨 결과가 메이저 건설업체의 대림산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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