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모르고 책상머리서 하는소리”
“현실 모르고 책상머리서 하는소리”
  • 윤지환 
  • 입력 2004-04-22 09:00
  • 승인 2004.04.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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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가 최근 전국의 윤락가를 단계적으로 폐쇄해 2007년도부터는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집창촌 관계자들은 정부의 이번 대책 발표가 ‘여성표를 노린 총선용 선심정책’이라고 비난했다.서울의 대표적인 집창촌인 청량리의 한 업주는 “해가 바뀌고 선거 때만 되면 매번 나오는 소리가 윤락가를 없애겠다는 것인데, 윤락가가 없어지면 누가 박수라도 쳐주는 줄 아느냐.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집창촌 업주들의 모임인 ‘한터’ 관계자들은 실상 미성년자를 고용해 강제 성매매를 시키는 등 불법영업은 집창촌이 아닌 사각지대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7일 저녁 미아리 텍사스를 찾았다. 예전 같으면 붉은 조명으로 화려하게 물들여진 텍사스 거리는 손님들과 이들을 유혹하려는 아가씨들로 시끌벅적할 시간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업소마다 꽃단장을 한 아가씨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붉은 조명아래 한 두명의 아가씨들이 지루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지루해 하기는 이곳을 순찰하는 경찰도 마찬가지 인 듯해 보였다. 종암 경찰서에서 순찰 나왔다는 한 경찰은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고 사건이 터지는 곳이 많아 순찰할 때 약간 긴장이 됐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없어 아가씨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라며 이곳의 분위기를 전했다. 붉은 조명을 끄고 문을 닫아건 업소도 곳곳에 보였다. 그 중 어떤 업소는 ‘점포임대’라고 씌어진 종이를 업소 유리문에 붙여 놓은 곳도 있어 쇠락해가는 텍사스의 단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한때 ‘대한민국의 예쁜 여자들이 다 모였다’는 찬사를 받으며 성업했던 청량리588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는 미아리 텍사스보다 조금 나은 듯해 보였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텍사스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4년간 일했다며 자신의 예명이 ‘아미’라고만 밝힌 한 여성은 이번 정부의 집창촌 폐쇄방침에 대해 “인터넷이 있는 이상 아무리 집창촌을 없애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여기 없어지면 다들 다른 식으로라도 윤락업을 계속할 것이고, 다른 일을 할 생각 안한다”고 잘라 말했다.미아리 텍사스를 담당하고 있는 종암 경찰서의 한 관계자도 “여성부에서 선도보호시설을 운영하면서 윤락여성들을 선도하려 하고 있지만 그리 효과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텍사스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선도하려 해도 쉽게 돈벌던 타성에 젖어 다른 일은 안하려 한다”고 전했다.이 관계자는 또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면서 선도하려 해도 다른 일을 좀 하다가는 ‘적성에 안맞다’, ‘돈을 적게 준다’, ‘적응이 안된다’ 는등의 이유로 다시 윤락녀로 돌아가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텍사스의 한 업주는 여성부의 이번 정책에 대해 “지금 상황으로서는 가만 놔둬도 다들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있는 추센데 굳이 없애겠다고 나서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요즘 윤락업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강제로 성매매를 한다든가 폭행, 갈취를 하는 등의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는 또 “어느 직장이든 사기나 비리, 상사의 폭행 혹은 성추행 등 많은 문제가 있듯이 우리 업계도 일부 업자들의 잘못으로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실제로 텍사스의 한 여성은“일반 직장과 다를 바 없다. 출퇴근도 자유롭게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하면 된다. 누구도 강압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또 “업소에서 밥도 주기 때문에 따로 쓸 돈이 없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 달 급여로 200만~250만원 정도 꼬박꼬박 통장으로 받으며 한 달에 저축도 150만원 이상 한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또 다른 업소의 여성에게 물어도 마찬가지 대답을 들었다. 텍사스에 온지 2년 됐다는 이 여성은 “요즈음 장사가 안 돼 하루에 찾아오는 손님은 평균 1~2명에 불과하지만 (일이 없으니) 쉬고 싶다고 하면 (업주가) 굳이 일하라고 강요도 하지 않는다”며 “어떻게 보면 일반 직장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라며 살짝 웃었다. 그들에 따르면 현대판 ‘노비문서’라느니 하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용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요즘은 아가씨들에게 몹쓸 짓 했다간 큰 일 난다는 인식이 박혀있다. 아가씨들이 당하고 가만있지 않기 때문이다”면서 “오히려 일부 아가씨들이 퉁치기(업소로부터 선불금만 받고 도주하는 것) 등의 수법으로 업주의 돈을 챙기고 도주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업주들이 큰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또 종암 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현장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경찰들은 실무자 입장에서 볼 때 집창촌을 폐쇄하는 것 보다 공창제를 도입하는 쪽이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40여년 전통의 인천 학익동 윤락가가 11월까지 폐쇄된다. 현재 이곳에는 60여 업주와 180여명의 윤락녀가 있는데, 업주 중 70%가 수천만원의 권리금을 낸 세입자들이다. 인천시는 건물 감정평가를 거쳐 보상을 해 주는 방식으로 모두 없애기로 업주들과 합의했다. 남구의회와 인천시의 합동작전이 계획대로만 추진된다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집창촌 폐쇄의 성공적 모델로 꼽힐 전망이다.

윤지환  jjd@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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