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전쟁이다!’
2005년 4월16일. 국민의 눈과 귀가 온통 몇 초 단위로 쏟아져 나오는 긴급 뉴스 속보에 쏠려 있다. 이날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1면 광고를 걷어내고 시커먼 먹판으로 ‘일본 극우파 공격대 독도 무단 점령, 한국 독도 수비대 몰살’ 이란 머리기사를 전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서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을 통과한지 불과 한달 만으로 그날의 울분과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이다. 한국 정부는 경악과 충격의 늪에 빠졌다. 한달 전 일본정부의 사과로 무마됐던 시마네현 의회 통과 사건 직후 터진 일이라 이들은 온통 정신적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을 비롯해 이해찬 국무총리,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 윤광웅 국방부 장관, 반기문 외교 통상부 장관 등이 참석한 긴급 전략회의가 소집됐다.
대통령은 비장한 표정으로 결전 의지를 밝혔다. 이어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각 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시마네현 사건 당시 군사적인 열세를 이유로 신중론을 제기했던 이들은 강경론자들의 울분에 찬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1시간도 채 안 돼 분노를 삭이지 못한 시민들에 의해 일본 대사관은 잿더미로 변했고, 할복, 투신 등 극단적 행동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국민적 정서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의 즉각적인 성명이 발표됐다. 시마네현 사건 당시 발표됐던 대일 신독트린의 수위를 뛰어넘는 것으로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과의 국교 단절을 선포하는 동시에 독도를 점령하고 있는 무장세력을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군사 공격 등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선포했다.
같은 시각.
일본도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필두로 대책회의가 한창이다. 한달 전 시마네현 사건 당시 ‘한국측의 지적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는 등 친한 노선을 펴고 있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총리의 항의 전화를 뒤로 한 고이즈미 총리의 표정엔 살포시 미소가 어려 있다. 어찌됐건 일본으로서는 한국군이 선점하고 있던 독도 쟁탈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독도 정상에 일장기를 꽂을 수 있느냐가 이번 계획의 관건이었다. 독도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마당에 국제사회에서는 현재 독도를 누가 차지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국정부의 항의서한이 전달됐다. 곧바로 일본 외무성은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다케시마는 원래 일본 영토이므로 일본인들의 독도 정착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성명의 골자였다. 일본의 행동은 민첩했다. 한국정부가 대책회의를 하느니 성명을 발표하느니하고 부산을 떨고 있는 동안 일본 함대는 재빠르게 독도 주변을 에워쌌다.
한국 해군이 독도 점령에 대한 대응태세를 미처 결정하기도 전이었다. 당황한 한국 정부는 오래된 우방인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 국무부는 “국제법에 따라 해결할 일”이라며 중립을 지켰다. 미국의 침묵은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은 우선 독도를 포함한 영토분쟁에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섬을 둘러싼 영토분쟁은 국제적으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만 미국은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는 것을 지금까지의 불문율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미국이 처해 있는 영토분쟁과 독도사태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마키아스실이라는 섬을 놓고 캐나다와 다투고 있는 상태였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지대에 있는 이 섬을 현재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캐나다. 캐나다는 1832년 이 섬에 등대를 설치하고 경찰경비대가 순찰 활동을 벌이며 100년이상 실질적으로 이 섬을 점유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1984년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비슷한 셈이다. 미국의 침묵은 한·미 방위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으로 얽혀 있는 미묘한 군사관계 탓도 있다. 이미 일본은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최근 북핵문제와 주한미군기지 이전 등의 현안을 둘러싼 미묘한 견해 차이로 한·미동맹관계에 균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미동맹의 이완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지가 약화됐다고 보고 독도 문제를 밀어붙인 것이고 결과는 일단 대성공이었다. 일본으로선 최단 시간에 국회에서 독도 영유권을 의결하는 절차만 밟으면 된다. 한국으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유엔에 호소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보리가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도 사건을 긴급안건으로 상정한 것은 사건 발생 3일 뒤인 4월 19일.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노림수에 걸려든 것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경계하는 중국이 일본의 무력사용을 강력히 규탄했지만 안보리는 일본의 도발에 어떠한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은채 “이 사태가 양국의 무력 충돌로 비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점잔을 뺐다. 안보리가 고작 한 일이라고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 그 판결에 따르기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독도문제를 국제여론화 하려고 한 일본의 숙원이 이뤄진 셈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명분을 쌓아왔던 일본으로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란(실제로는 현재 추진중)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과 함께 판결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한가하게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 따위를 기다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돌출 행동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어민 10여명이 떼를 지어 독도 착륙전을 강행했고, 일본은 독도 점령 직후 12해리 영해법을 적용해 민간인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일본 군함의 포사격을 퍼부어 댄 것. 민간인을 태운 어선이 일본의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소식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여론을 살피며 꾹꾹 눌러 왔던 한국민의 감정을 일시에 폭발시켰다.정부는 해군 2· 3함대 소속 구축함을 동해로 이동시켜 1함대를 지원하는 방안과 더불어 잠수함 전력을 극대화 하는 전략 작전에 들어갔고 임진왜란 이후 400년만에 한일 양국간 해전이 펼쳐져 동해 앞바다를 가르는 미사일과 포탄이 빗발쳤다. 양국 해군의 국운을 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두나라의 전투력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이 전쟁의 승패를 짐작하고 있었다. 대전 30분도 못돼 한국의 대표적인 구축함인 광개토대왕 함이 일본 이지스함으로부터 집중적인 미사일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때마춰 중국과 러시아도 자국 해군에 긴급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했다. 독도 전쟁에서 시작된 한·일 전면전은 동북아 전체의 전쟁으로 확산되는 시작일 뿐이었다.
이혜숙 softpe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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