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아홉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올려 글로벌 기업으로 성공한 ‘두산그룹’이다.
1864년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는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상인이다. 그는 10대 초반 무렵 등잔용 석유와 피물 등짐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장사 수완을 익혔다. 해남과 평안도·경상도·강원도 등 전국을 떠돌며 모은 돈으로 1896년 8월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을 개설했다.
‘근자성공’으로 위기 극복
1930년대 이미 70세를 넘어선 박승직 창업주는 더 이상 경영에 매진하기 어려워지자 아들 박두병을 불러들였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새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두병은 1936년 4월 상무로 입사해 본격적인 세대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박두병<사진>은 좌우명으로 ‘근자성공(勤子成功·부지런한 자가 성공한다)’ 이라는 사자성어를 늘 가슴에 새겼다. 그는 일제 치하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신뢰와 성실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한편, 전국에서 들어온 품목과 더불어 무역을 통해 들여온 외국품목까지 취급하며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기업경영의 혁신 일으켜
아버지에 이어 회사를 이끌게 된 박두병은 박승직 상점을 근대화된 기업체로 변신시키고자 노력했다. 출근부 작성을 통해 직원들에게 시간은 곧 신용이자 생명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 한편, 업적 평가를 통해 차등지급하는 유능·성실한 직원을 우대했다. 적성에 맞는 직원을 적지에 배치하면서 여직원 고용을 늘리기도 했다. 직원들의 복리후생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직물류의 가격과 수요공급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정보수집을 위해 서울과 지방은 물론 해외시장 정보까지 물색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가 이끈 박승직 상점은 1938년 상점 창립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그는 1933년 12월 소화기린맥주(전신 오비맥주)에 한국인 주주로 참여했다.
한국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당시 상업계에 유력자였던 박두병을 참여시켜 판로를 확보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6·25 전쟁 후, 국고로 귀속된 소화기린맥주 관리책임자로 박두병이 임명됐다. 그는 단시일 내에 공장을 가동시켰다. 후일 맥주사업은 박승직 상점에서 이름을 바꾼 두산상사와 함께 두산그룹 출범의 토대가 됐다.
‘두산상회’ 출발
‘두산(斗山)’이라는 지금의 상호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46년이다.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어느 정도 사회 질서가 잡히자 박승직 상점은 문을 열고 활동을 재개했다. 앞서 소화기린맥주 관리 지배인이었던 박두병은 가업의 승계이자 명실상부한 자신의 사업체로 박승직 상점을 무역업체로 부활시키기 위해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1946년 1월 그동안 고립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미 군정청이 1946년 1월 면허제로 무역을 재개시켰다. 하지만 박승직 창업주가 나서기에는 너무 노령이었고, 박두병도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 일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즉각 실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무역업과 관련이 있는 운수업을 먼저 시작하기로 하고 상호도 새로 바꾸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두산상회’이다.
두산은 박승직 창업주가 직접 지은 것으로 박두병에게 “네 이름 가운데 자인 두(斗)자와 산(山)자를 붙여 두산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직접적인 뜻은 ‘한 말 한 말 끊임없이 차근차근 쌓아올려 산같이 커져라’는 재화의 축적을 의미한다.
국내 첫 전문경영인제 도입
1945년 10월 13일, 패기만만한 26세의 정수창이 소화기린맥주 평사원으로 첫 출근했다. 앞서 박두병은 경성고상 은사인 이인기 교수에게 ‘쓸 만한 젊은이’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인기 교수는 박두병의 경성고상 9년 후배이기도 했던 정수창을 추천했다.
정수창은 최인철·윤현주·명주현 등과 함께 박두병 회장과 고락을 같이 한 전문경영인 중 한명으로, 향후 두산그룹 회장의 자리에 오르며 국내 재계 역사상 첫 ‘전문경영인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경성고상을 졸업한 후 중국 만주에서 흥업은행 은행원을 지내던 정수창의 특기는 영어였다. 당시 미 군정 관리 아래에 있던 소화기린맥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고, 미군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영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입사 후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 군정 측과 민간 측이 공존하던 2원 체제의 경영구조 아래서 원활한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업무 추진력까지 겸비한 그를 박 회장은 자신의 후계자라 여기고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기대에 부응하듯 입사 7년 만에 동양맥주 상무에 오른 정수창은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동양맥주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양조기술 자립, 맥주의 원료인 맥아공장 가동,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인 ‘마주앙’ 탄생 등 수많은 일을 박병두와 함께 해냈다.
하지만 전무로 승진 후 2년 만인 1965년 정수창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삼성그룹 계열사인 새한제지로 자리를 옮겼다. 박두병이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후일 그는 개인적인 서운함이 아니라 보수적인 경영을 하는 박두병에게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성장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박두병은 공직에 전념하기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그동안 꿈꿔왔던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직접 실천에 옮겼다.
이듬해인 1968년, 그는 “회사 창설 때부터 이 생각을 해왔으며, 이제 그 실천의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면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반드시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두병이 선택한 후계자는 정수창이었다. 삼성물산 사장을 끝으로 4년간의 외도를 마친 그를 박두병은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박두병은 “나는 이제 대한상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이며, 상의 일이 잘 되면 한국 전체 상공인이 잘 되는 것이니 전체 상공인을 돕는 의미에서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1969년 12월 정수창은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하고, 박두병은 사장에서 회장으로 직함을 바꿔 경영일선에 물러났다.
1973년 폐암을 얻은 박두병은 그룹 회장에 정수창 사장을 앉혔다. 이는 20여 년 동안 자신과 함께 그룹을 키워온 그만이 회장의 적입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간산업 통한 ‘경제보국’
1963년 9월 25일, 박두병은 7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났다. 이 여행길에는 당시 동양맥주 전무였던 정수창이 동행했다. 외환사정이 좋지 않아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던 시절에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외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행 목표는 동양맥주의 공장시설 확장에 필요한 기자재 도입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박두병은 심혈을 기울인 언론사업인 ‘합동통신’과의 계약을 위해 독일 dpa, 프랑스 AFP, 영국 로이터 등 세계 통신사를 돌아보면서 그들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목적도 있었다. 아울러 전 세계를 돌면서 각국의 맥주를 시음하며 OB맥주의 해외시장 개척의 전망을 파악하는 것도 겸했다.
서울을 출발한 두 사람은 도쿄와 홍콩을 경유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들렸다. 그리고 보름간 서독(현 독일) 수도 본(Born)에 있는 독일연방공화국 의사당과 함부르크에 있는 맥주회사, 테트몰트의 시날코, 통신사 등을 비롯해 주요 산업시설을 방문했다.
박두병은 1965년을 동양맥주의 1차 시설확장기로 내다보고, 그때에 필요한 기계들을 도입하기 위해 코스모스 엑스포트와 직접 새로운 교섭에 착수했다. 냉동기·냉각기·발효 저장 탱크·제품기 등 광점한 기계류의 도입선을 논의했다.
박두병은 주변 지인들에게 “언젠가는 OB그룹(현 두산그룹)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간산업을 담당해야 한다”고 늘 말했다. 동양맥주 사업에 온 힘을 기울여온 그는 맥주사업을 넘어 ‘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 진출을 꿈꿔왔다.
아버지 박승직 창업주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그가 두산상사를 통해 처음 시작한 사업은 무역업이었다. 부족한 물자를 해외에서 들여오기 위해 시작했지만 우리 산업이 성장하면 수출을 많이 할 것이며,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무역업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중화학공업도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기 위해 반드시 참여 해야 한다고 여겼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박두병은 정부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9~1972)을 통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두병은 이제 그 적절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전혀 다른 분야로 곧바로 진출하는 것은 위험도가 컸다.
때문에 박 회장은 우선 동양맥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관 사업체를 설립하고 기존 사업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했다. 처음으로 설립된 계열사는 오늘날 두산건설의 전신인 동산토건이었다. 동양맥주 영선과를 독립시켜 1960년 7월 설립된 동산토건은 업체들의 난립으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착실히 실적을 쌓아올렸고, 1966년 7월에는 기존 토목·건축업 면허에 전기공사·설비공사 면허를 추가해 수주 영역을 확대했다.
건설업에 이어 그가 눈을 돌린 분야는 기계공업이었다. 그는 1967년 봄부터 맥주생산을 지원하는 기계제작 회사의 설립을 추진해 같은 해 5월 동앵맥주의 시설 개보수를 맡고 있던 공무과를 분리·독립시켜 윤한공업사(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설립했다. 관련 업체의 시설 개보수 고사에 머물던 윤한공업사는 1968년부터 영업종목에 자동차 정비사업과 전기 가공사업을 추가해 매출 증대와 자립기반의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박두병은 휴전 이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맥주병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유리병 제조공장 직접 설립을 모색했다. 이런 가운데 1969년 4월 당시 국내 유일의 판유리 회사인 한국유리공업과 농어촌개발공사가 합작한 유리병 생산업체 한국병유리가 설립됐다. 설립 과정에서 박두병은 지분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참여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리병 최대 수요자인 동양맥주가 빠질 경우 한국병유리는 사업에 큰 차질이 불가피했다. 결국 정부는 한국유리가 보유한 한국병유리 지분 65%를 동양맥주에 인계하기로 결정했으며 박두병은 회사를 인수했다. 1971년 4월 일산 28만 개의 군포공장이 완공된 후 한국병유리는 맥주병과 콜라병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 코카콜라로부터 코카콜라병 생산 자격도 확보해 1972년 3월에는 일본에 코카콜라병 662만4000개를 수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동산토건과 윤한공업사, 한국병유리는 설립 초기에는 두각을 전혀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과 대우종합기계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그룹 체제를 중공업으로 180도 전환시킨 것이 두산그룹의 현재를 만든 밑바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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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 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 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