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의 가면, 드디어 벗겨지다
1936년, 왕십리 395번지에 살고 있는 유인호라는 53세의 부자가 백백교에 가입해 재산을 헌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재산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어서 백백교 간부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전 재산을 헌납하라고 해도 재산을 바칠 듯하면서도 조금씩밖에 바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인호가 백백교에 열성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유인호는 자신의 딸 유정전까지 백백교에 입교시켜 전용해의 첩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백백교에 끌어들였다. 백백교의 본부가 있는 신당동과 왕십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유정전은 전용해의 첩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한낱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정전은 친정인 왕십리의 집에 가서 오빠 유곤룡에게 전용해가 사이비종교 교주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놈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앗아갈 때부터 수상하게 생각했다고!”
유곤룡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펄쩍 뛰었다.
“교주는 첩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난 한낱 노리개라고요.”
유정전이 울면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하소연하자 유곤룡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득달같이 아버지 유인호에게 달려가서 백백교를 빠져나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유인호는 아들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재산 때문에 백백교 교주 전용해를 험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놈을 이리로 유인해와라. 아버지가 내 말을 믿지 않으니 아버지 앞에서 그놈의 가면을 벗겨야겠다.”
유곤룡이 동생 유정전에게 말했다.
“오빠, 배신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요.”
“아버지가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거짓말을 해라. 그러면 놈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유곤룡은 유정전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신당동으로 돌려보냈다. 전용해가 신당동 본부로 돌아오자 첩 유정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주연을 마련하고 교주님을 청하십니다.”
유정전이 절을 올리고 전용해에게 아뢰었다.
“네 아버지 유인호가 나를 청해? 무슨 일로 나를 청한다는 말이냐?”
전용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유정전을 살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유정전의 아버지 유인호는 돈을 바칠 듯하면서도 바치지 않은 능구렁이와 같은 늙은이였다. 유인호의 재산은 1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시내에 빌딩을 지을 만한 금액이다.
“새해가 되지 않았사옵니까? 하늘님이신 교주님께 인사도 드리고 땅문서도 바친다고 합니다. 교주님께 의탁하여 큰 벼슬을 얻고자 하십니다.”
“아무렴, 나를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전용해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돈을 바치겠다고 해서 그런지 유정전이 아름다워 보였다. 전용해는 마침내 문봉조와 말단 간부 몇을 데리고 유정전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유정전의 집에는 재산을 바치겠다는 유인호는 보이지 않고 백백교를 좋아하지 않는 유곤룡이 술상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처남이로구만. 처남이 재산을 바치겠다고 했는가?”
전용해는 재산을 바치겠다는 유정전의 말에 속아 유곤룡을 보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설득하여 전 재산 10만 원을 바칠 것입니다. 우선 한 잔 드십시오.”
유곤룡은 전용해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문봉조와 전용해를 수행한 벽력사들에게는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게 했는데 독한 술이었다.
“아버님은 어디에 갔는고?”
“돈을 마련하러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술을 드시고 계시면 돌아오실 것입니다.”
유곤룡은 매우 치밀한 사내였다. 그는 전용해에게 술을 권하면서도 밖으로 나와 다른 방에 있는 문봉조 등에게도 술을 권했다. 문봉조를 비롯한 벽력사들은 대취했다.
“왜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노?”
유곤룡이 문봉조 등에게 술을 권하고 돌아오자 전용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유곤룡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나 나가보았습니다. 교주님, 한 잔 더 드십시오.”
유곤룡이 다시 술을 권했다. 전용해는 의심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교주님께서는 첩이 얼마나 되오?”
유곤룡은 전용해가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를 걸었다.
“뭣이?”
전용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은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있으니 의자왕이 부럽지 않고 진시황이 부럽지 않을 것이오.”
유곤룡이 웃음기를 가득 담고 말했다.
“이놈! 죽고 싶으냐?”
전용해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쏟아졌다.
“뭣이 어째? 우매한 농민들을 속여 재산을 팔아 바치게 하고 여자들을 첩으로 거느리거나 살해해서 죽였다는 걸 다 알고 있다! 네놈이야말로 죽일 놈이야!”
“이놈!”
전용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용해보다 먼저 일어난 유곤룡이 냅다 발길질을 했다. 유곤룡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전용해는 억 하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술상과 함께 나뒹굴었다. 유곤룡은 재빨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친구들에게 참나무 몽둥이를 나누어주고 대기시켜 놓았던 것이다. 유곤룡의 신호가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전용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어이쿠, 하늘님 살려라!”
전용해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전용해는 용력이 비상한 사내였다. 그는 유곤룡의 친구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도 후닥닥 일어나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놈 잡아라!”
유곤룡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던 문봉조와 이경득 등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든 유곤룡의 친구들과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전용해와 이경득 등은 혼란한 틈을 노려 달아나고 몇몇 말단 간부들이 잡혔다. 유곤룡은 전용해와 이경득을 뒤쫓았으나 그들은 이미 왕십리 보통학교(초등학교) 쪽으로 달아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곤룡과 친구들이 잡은 것은 백백교의 말단간부 셋뿐이었다.
“이놈들이라도 주재소로 끌고 가자.”
유곤룡은 백백교의 말단간부들을 사로잡아 하왕십리 주재소로 끌고 갔다.
“뭐야?”
주재소 소장이 유곤룡과 백백교 졸개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들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에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애쓰지는 못할망정 싸움질이나 하다니!’
주재소 소장은 그들이 하릴없이 싸움질을 벌이고 주재소로 몰려온 것이라 여겼다.
“이놈들이 죄 없는 백백교의 신자들을 살해했습니다. 수십 명의 신자들을 죽인 살인마들입니다.”
유곤룡이 소리를 지르자 주재소 소장은 벌컥 화를 냈다.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도 아닌데, 소장은 수십 명을 죽였다는 유곤룡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수광 기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