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변화를 탐구하고, 변화에 대응하며, 변화를 기회로 이용한 한화그룹이다.
5.16군사혁명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김종희도 한국화약이 화약 하나에만 연연하고 있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약이 대중화된 상품이 아니고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만 팔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에 화약회사 자체가 성장해나가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김종희는 화약 산업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화약회사들처럼 합성의약이나 농약제품, 기타 도료나 염료 같은 관련 산업 분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됐다.
1961년 8월, 김종희는 한국화약의 연관산업 진출을 추진할 목적으로 본사에 기획실을 설치하고, 한국은행 영업부에서 10여 년간 근무해온 권오균을 스카우트 했다. 그리고 널리 유능한 중견사원을 특채하기 시작했다.
한편, 본사 기획실에서는 화약을 중심으로 하는 군수산업 분야와 함께 이산화티탄을 포함한 정밀화학 분야의 사업성이 광범위하게 검토되고 있었다.
당시 6·25 전쟁 중에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벤플리트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실업인 28명이 한·미간의 민간경제 제휴를 협의하기 위해 국내에 내한해 2주일 동안 국내 경제인들과의 폭 넓은 접촉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김종희는 PVC 프로젝트에 관한 합작투자를 미실업인과 합의했는데, 그들의 투자조건이 AID(美 국제개발처) 차관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구체적은 합의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 후 김종희는 기획실에 합성수지에 대한 사업성을 검토하게 하는 한편, 7월에는 선진 외국의 화공업계를 둘러보기 위해 인천공장 생산부 차장 겸 연구실장인 신현기를 대동하고 일본·미국·영국·이탈리아·프랑스·서독·스웨덴·스위스·터키 등 해외 하공업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김종희는 미국에서 돌아본 뒤퐁(Dupomt)사의 연구실 모습에 자극돼 인천공장 연구실을 대폭 보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뒤퐁 사는 프랑스 국립화약제조소에서 근무한 적 있는 뒤 퐁드 느무르(Du pont de Nemour s)가 미국으로 이민와서 1802년에 델라웨어주 월밍턴에 화약공장을 건설한 이래로 2세기에 걸쳐 세계적인 화약 메이커로 군림하며 그 왕좌를 지켜오는 미국의 대표적인 화학회사다.
처음에는 화약으로 시작해서 각종 화학약품과 염료·질소·메탄올·고급 알콜·합성고무 등을 만들면서 나일론을 발명하고, 지금은 원자탄과 수소탄 연구 제조에도 참여하고 있다. 뒤퐁 사의 연구실을 한 번만 둘러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회사가 오늘날과 같은 미국 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해 온 이유를 한눈에 알 수 있다. 27만여 평에 달하는 광활한 연구단지 안에서 종사하고 있는 연구원이 무려 2400여 명이다. 그들 가운데는 박사나 석사학위를 가진 전문 인력만도 1000여 명을 헤아린다.
물론 한국화약이 당장은 뒤퐁 사를 따라갈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김종희는 적어도 한국화약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화학회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연구비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
김종희는 한 해 동안에도 늘어날 화약 수요에 대비해 날화기 2대를 추가로 설치한데 이어 날화기 가마 12대를 바꿨다. TNT 분쇄공장을 신축하고 포장공실을 증축하면서 최신 자동포장기계를 서독에 발주하는 한편, 제1·2·3·5 포장공실에 롤러 컨베이어(Roller Conveyer)를 설치해 작업능률을 높이고 안정성을 제고시켰다.
그 무렵 기획실에서는 신한베어링공업주식회사 인수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부평에 있는 신한베어링 공장은 원래 일본의 3대 베어링 메이커의 하나인 고요 베어링이 1937년에 군수용 베어링을 생산하기 위해 건설했던 것이다. 8·15해방 후에는 육군 조병창이 관리해오던 것을 유병선이 1953년 신한베어링공업 명의로 인수하고 각종 베어링 강구 및 기타 기계부속품을 생산 판매해오다가, 1958년 ICA 자금 20만 불을 들여 서독에서 최신기계까지 도입하는 등 의욕적으로 생산시설을 대폭 확충해온 우리나라 유일의 베어링 공장이다.
김종희는 국산 베어링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서독에서 최신기계까지 들여왔지만 결과는 오히려 자금사정을 악화시켰다. 기계공업은 막대한 투자인데 비해 회임기간이 늦은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베어링의 경우는 시설 개선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늘지 않아 산업은행에서 대출한 ICA 자금 20만 불에 대한 금리부담만 가중돼 갔다. 국산 베어링의 품질이 다소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군부대에서 유출되는 외제 베어링이 시장에 범람하고 있어 판매 전략상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한베어링에서는 회사운영을 위해 부득이 총 발행주식의 60%를 할애하고 두 사람의 동업자를 영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자 동업자 두 사람은 김종철에게 자신들의 주식을 인수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김종철과 가까이 지내던 4대 국회의원으로 그가 지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 한 후에 빚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쪽에 대답을 해줘야 할 텐데 뭐라고 할까, 김 사장?”
“맡을 수도 없고, 안 맡을 수도 없고 고민이에요.”
“장래성은 있는 건가?”
“장래성이나마나 신한베어링이 저대로 잘못되는 날이면 20만 불이나 들여 새 기계까지 들여왔는데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 아닐까요?”
‘국가사회에 기여하자’는 한국화약의 사훈은 전시용 구호가 아닌 김종회의 일관된 창업이념이다. 그는 1963년이 저물기 전에 신한베어링 주식 60%를 인수하고 1964년 1월 4일을 기해 대표이사에 취임함으로써 창업 12년 만에 처음으로 화약 이외의 업종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김승연 회장 체제 돌입
1981년 김종희 회장이 갑자기 영면하면서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 체제의 제2창업기를 맞는다. 1995년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에는 사업영역의 다각화가 추진됐다.
1982년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하면서 화학 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이루었으며, 1985년 ‘정아그룹(현 한화호텔&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인수를 통해 레저·유통산업에 진출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빙그레이글스(현 한화이글스)’ 창단, ‘한화역사’ 설립, ‘한양소재’와 ‘한양바스프우레탄’ 설립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 진출을 꾀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경향신문을 인수했으며 한화파이낸스와 제일투자자문(현 한화투자신탁운용) 설립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해 금융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그룹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PRO-2000운동·PRO-2000 신품운동, 제3의 개혁, 혁명적 개혁 등과 같은 경영혁신 전략을 순차적으로 추진해 그룹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1996년 10월 김 회장은 혁명적 개혁을 선언하면서 한화그룹의 구조조정기가 시작됐다. 김 회장은 1980년대부터 진행됐던 개혁이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하면서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자세로 21세기형 사업구조로 그룹을 재편할 것임을 밝혔다. 이에 한화그룹은 1999년까지 선제적이고 급격한 구조조정을 진행해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1997년 ‘한화바스프우레탄’을 독일 바스프사에 매각한 것을 첫 신호탄으로 이후 한화는 ‘한화NSK정밀’을 일본공정(NSK)에, ‘한화GKN’을 영국 GKN에, 한화기계 베어링 사업부문을 독일FAG와 합작으로 설립한 FAG 한화베어링에 각각 매각했다. 또 한화자동차부품을 캐나다 테스마에 매각하고, 그룹 매출의 40%에 육박하던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매각했다.
재계 자율 빅딜방식으로 한화석유화학은 대림산업과 NCC합작사 여천NCC를 설립하고 일부 유화 사업을 맞교환 했으며, 한화의 의약부문을 분사해 ‘에이치팜(현 드림파마)’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부동산 등 자산 매각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대 들어서 경영관행과 기업체질의 개편을 통한 내실경영 완성 및 사업구조 고도화 추구, 새로운 경영평가시스템 구축, ERP경영 도입과 같은 제2기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한화는 21세기 신성장사업의 축을 금융으로 정하고 ‘대한생명(현 한화생명)’과 ‘신동아화재(현 한화손해보험)’·‘63시티’를 일괄 인수했다. 또 ‘동양백화점(현 한화타임월드)’ 등을 인수하면서 외환위기 당시 위축됐던 그룹의 사세를 다시 확장하는 도약기를 열었다.
한화그룹의 글로벌 성장기는 2007년 1월 태국에서 열린 해외산업진출 전략회의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김 회장은 글로벌 성장 비전과 해외사업추진 6대 실행테마를 제시하며 한화그룹의 글로벌화를 본격 지휘했다.
2005년 한화L&C 북미 자동차부품법인 설립을 시작으로 한화생명 뉴욕 현지법인 설립, 한화건설 사우디아라비아법인 설립, 한화L&C 미국 앨라배마 공장과 상하이 공장 준공, 한화증권의 국내 최초 카자흐스탄 진출과 한화L&C의 미국 아즈델(Azdel) 인수, 한화생명의 국내 최초 베트남 보험영업 인가 취득·한화케미칼의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화학회사 시프켐과의 합작법인 설립·중국 낭보PVC 공장 준공 등의 성과가 이어졌다.
2010년에는 중국의 ‘솔라펀파워홀딩스(현 한화솔라원)’ 인수에 이어 ‘한화솔라아메리카’와 ‘한화솔라에너지’ 설립, 독일 최고의 태양광 기업인 ‘큐셀’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라크에서는 10만호 80억불 규모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도 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 2012년 현재도 100대 기업에 포함된 기업은 7개에 불과하다. 이 7개 기업에 한화가 포함될 수 있었던 요인 중 첫 번째는 바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한발 빠르게 대응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일궈낸 창업자 김중희 회장과 김승연 회장의 리더십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한화그룹은 지난 60년간 경제의 기반을 닦고 성장을 이끌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의 선도 기업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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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김종희의 기업가 정신│전범성 지음│W미디어, 한화그룹 홍보팀>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