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①]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한화 ①]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2-05 11:55
  • 승인 2013.02.05 11:55
  • 호수 979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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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조국의 화약계 지키는 등대수 되자"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변화를 탐구하고, 변화에 대응하며, 변화를 기회로 이용한 한화그룹이다.

1952년 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 회장이 설립한 한국화약을 모태로 하는 한화그룹은 (주)한화를 비롯, 한화케미칼·한화솔라원·한화건설·한화갤러리아·한화호텔앤드리조트 등 국내 53개 계열사(2011년 말 기준)와 해외 138개 네트워크를 보유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금융·레저·유통·건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그룹 창립 6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는 태양광 비즈니스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도약, 신성장 동력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 현암 김종희 회장

화약계 입문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김종희는 화약을 공판하는 ‘조선화약공판’에 취직했다. 이 회사는 1939년 일제가 강력한 전시경제 체제를 확립할 목적으로 시행한 ‘기업정비령’에 의해 통합된 회사로 조선에 있는 각 화약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공판회사가 전량 구매하는 형식으로 인수, 운영했다.

당시 일제의 전시경제는 파국에 직면하고 있었다. 육상 수송 수단인 화물자동차와 여객자동차는 전부 목탄차로 개조 운행되고 있었으며, 국민들이 먹고 입는 것은 물론 신발과 옷을 빨아야 할 양잿물(수산화나트륨)까지도 배급품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군부에서는 1944년 화약 책임생산량을 독단으로 결정, 이를 조선화약공판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 해 화약 책임생산량을 통보받은 조선화약공판 중역들은 그 가공할 물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해 생산실적의 3배가 넘는 엄청난 책임생산량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책임생산을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역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구매부 글리세린계 사원으로 근무해 온 김종희가 생산부 다이너마이트로 승진했다. 그의 나이 스물셋. 조선화약공판에는 설립 이전부터 이미 화약계에서 몸담고 일해 온 조선인 사원들뿐만 아니라 징병 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병역이 면제된 일본인 사원들도 여럿 있었지만, 김종희가 승진의 기회를 잡았다.

승진 발령이 나던 당일, 마쓰무로 취체역은 김종희를 중역실로 불러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김 군, 승진을 축하한다. 생산부에 가서도 노력하길 바란다. 내가 너의 승진을 적극 추천한 데에는 너에게 화약에 관해 폭 넓은 수업을 시키고 싶어서다. 화약계에서 입신하려면 보다 많은 화약지식을 쌓아야 할 것 아닌가. 생산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공장으로 직접 출장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라! 네가 장차 화약회사의 사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김종희는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징용에 끌려가는 일이나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제가 하루빨리 전쟁에서 지게 되는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는 측량할 수 없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전대미문의 폭탄이 투하됐다. 이튿날인 8일에는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있었고, 다음날인 9일에는 다시 나가사키 상공에서 원자탄이 터졌다. 마침내 8월 15일 정오, 전국의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선량하고 충실한 시민들이여, 짐은 정부에 명하여 아메리카 합중국·영국·중국 ·소비에트 연방정부에게 우리 제국이 이들 여러 나라의 공동성명조건을 수락할 것을 통고했다. 이 같은 사정 하에 우리가 어떻게 우리 기천만의 신민을 구원하고, 또 우리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짐이 열강의 공동선언조건을 수락할 것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여 분간에 걸친 천황의 비통한 육성방송이 끝난 후, 그 날 오후 1시부터 시작된 경축해방 군중시위로 장안은 온통 만세의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환희와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여운형의 충정어린 설득이 있었지만 도처에서 일본인에 대한 시위군중의 보복 행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조선화약공판 역시 기가 꺾인 일본인 사원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김종희는 그 길로 홍제동 마쓰무로 취체역 사택을 향해 달려갔다. ‘마쓰무로 취체역에게도 어떤 보복이 가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홍제동 사택의 마쓰무로 취체역은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데로 옮기는 겁니까, 부장님?”

“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네.”

마쓰무로 취체역의 태도는 평소처럼 태연하고 침착했다.

“떠나다니요?”

“이제 일본인은 일본인으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아직은…”

“연합국은 이미 카이로선언에서 모든 일본인은 강점하고 있는 전 지역에서 추축돼야 한다는 사실을 못 박아 놓고 있어.”

“그럼, 부장님은 카이로선언도 알고 있었군요?”

“음…”

그는 일손을 쉬지 않았다.

“일본이 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을 거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고 해서 일본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일본에서 일본대로의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겠지.”

“그동안 부장님이 저에게 베푼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동안에 너에게 베푼 친절은 나의 호의가 아니다. 나의 욕심이었다고 해야 정직한 고백이 될 것 같구나.”

그는 일손을 놓고 김종희를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은 조선에 화약공장을 네 군데나 건설했지만 화약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조선인에게 화약에 대한 전문지식을 전수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화약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 땅에 나와 땀 흘려 이룩해 놓은 화약산업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선유치 인천화약공장의 몇몇 조선인 종업원을 초화공실이라든가 날화공실 같은 주요 생산 공정에 견습공으로 일할 수 있게 해왔어. 하지만 결국 인천공장이 그동안 휴업상태에 있었기에 그들이 기술에 익숙해질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 일본인이 조선에서 떠나고 나면 조선에 있는 화약공장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될 거야. 너도 아는 바와 같이 어느 공장에서도 조선인 화약 기술자는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그는 한숨을 내쉰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새 조선을 건설하는데 화약이 어느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지는 나로서는 아직 몰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약 없이 산업근대화를 이룩한 나라는 이 지구상에 단 한나라도 없다는 사실이다.”

김종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김군! 다행히 너는 지난 4년간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화약공판 구매부와 생산부에 근부해오면서 화약이 무엇이며, 화약이 어떤 경로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너의 조국 조선을 사랑하거든 우리 일본인이 조선을 떠난 후에라도 너만은 화약계를 떠나지 말아 다오! 이것이 너에 대한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김종희는 아무 말 없이 마쓰무로 취체역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화약인으로서 오직 외길인생을 살아온 마쓰무로 취체역의 진심은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화약계를 떠나지 말아 달라는 그의 부탁은 왠지 마음에 흔쾌히 와 닿지 않았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이바지해야 할 일 가운데는 화약보다 더 큰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계동에 있는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성백우 선배를 만난 것은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 점령할 것이라는 사실이 보도되던 날이었다.

“선배님, 미군이 들어와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면 우리나라는 바로 독립이 되는 건가요?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자네가 지금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제일 먼저 산업부흥을 이룩해야 한다네.”

“하지만 산업부흥보다 더 큰일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네는 다른 생각 말고 화약계에서 열심히 일해 주게. 그것이 바로 해방된 조국을 사랑하고 위하는 최선의 길일세. 나도 머지않아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교육계에 진출해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을 생각일세.”

김종희는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을 나서면서 마쓰무로 취체역이 하던 말을 뇌리 속에 떠올렸다.

‘너는 지난 4년간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화약공판 구매부와 생산부에 근무해오면서 화약이 무엇이며, 화약이 어떤 경로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너의 조국 조선을 사랑하거든 우리 일본인이 조선을 떠난 후에라도 너만은 화약계를 떠나지 말아 다오!’

형 김종철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어차피 누군가 화약을 잘 아는 사람이 화약공판 일을 책임지고 관리해나가야 할 것 아니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애국자냐, 입으로 애국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애국자냐?”

그 무렵 김종철은 학병에 끌려갔다가 귀환한 동지들과 함께 국군준비대를 결성한다고 분주할 때였다.

“그렇다! 명예는 얻지 못할지 모른다. 빛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해방된 조국의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가 되는 거다!”

김종희의 발길은 부지런히 남대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김종희의 기업가 정신│전범성 지음│W미디어, 한화그룹 홍보팀>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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