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집앞 골목은 더욱 한산했다.송씨가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송씨의 입을 틀어막으며 밀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놀란 송씨가 거칠게 반항하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흉기를 가까이 들이대며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범인은 겁에 질려 항거불능 상태인 송씨로부터 현금 50만원을 강취했다. 그러나 범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텅빈 집안에 혼자있는 송씨에게 순간적인 욕정이 생긴 범인은 넥타이로 송씨의 눈을 가리고 강간을 시도했다. 하지만 송씨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 옷을 벗기려는 범인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이 때문에 범인이 당황하자 황급히 집밖으로 피신, 간신히 봉변을 면했다.
골목으로 뛰쳐나온 송씨는 “강도야!”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범인은 이미 달아난 후였다.서울 수서경찰서는 오전과 낮시간대 일원동과 개포동 일대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강간미수 및 강취사건에 대한 제보를 받고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경찰은 범인이 타고 달아났다는 승용차 번호판과 피의자의 신상에 관한 피해자측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망을 좁혀나갔다. 그 결과 스펙트라 차량 소유주의 범행으로 밝혀졌고 그의 주거지 앞에서 잠복하던 중 용의자 유진석(30·가명)을 발견, 긴급체포했다.특히 조사 과정에서 이번 사건 외에도 추가로 줄줄이 드러나는 유씨의 범죄행각으로 인해 경찰측에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건을 담당한 강력5반 정호영 반장은 “유씨는 99년 여름부터 이번 사건으로 검거될 때까지 무려 6년 동안 집안에 혼자있는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현금갈취 및 강간을 일삼아왔다”며 “그의 범죄행각은 도합 29회”라고 전했다.
조사결과 밝혀진 그의 범죄행각만해도 강도 12회와 강간 14회(강간미수 5회)에 달했고 그 와중에 현금을 비롯한 2,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강취한 것으로 드러났다.유씨는 서울과 경기 일대 인적이 드문 주택가 등지에서 범행대상을 물색한 뒤 현관문이 열리는 틈을 이용해 집안으로 침입했다. 특히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집안에 혼자 있는 주부는 유씨의 가장 좋은 ‘먹이감’이었다. 정 반장은 “유씨는 범행대상을 정한 뒤 한참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이들이 출입문을 드나들거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틈을 타 집안으로 침입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유씨는 피해자가 신고하지 못하도록 성폭행을 하거나 신분을 알아두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가져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조사결과 유씨는 시장에서 수산물 배달을 해왔으나 신용불량 상태로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유씨는 180㎝의 키에 상당한 미남으로 그의 범죄행각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귀띔하며 장기간에 걸쳐 저지른 유씨의 뻔뻔하고 파렴치한 행각에 혀를 내둘렀다.정 반장은 “카드빚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일침을 가했다. 그는 또 “유씨는 주로 오전과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다”며 “특히 집에 혼자있는 주부들의 경우 현관문을 여닫을 때나 잠시 외출을 할 때도 항시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피해여성 일부, 순간 기지로 강간 면해”
간질증세 있는듯 연기 하거나 ‘아들 곧 온다’속이기도
이번 사건을 담당한 수서경찰서 강력5반 정호영반장은 기자에게 사건의 흥미로운(?) 뒷 얘기를 해주었다.무엇보다 유씨가 6년동안 저지른 사건을 살펴보면 ‘강간미수’건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이에 대해 정반장은 “피해 여성들이 순식간에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해 큰 봉변을 모면했기 때문”이라 귀띔했다.피해여성 중 한명인 A씨는 유씨가 집안에 침입해 강간을 하려들자 간질증세가 있는 듯 연기를 했다.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늘어지며 정신을 잃은 것처럼 심한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갑작스런 A씨의 행동에 놀란 유씨는 강간을 포기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앞둔 B씨도 지혜로운 대처방법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유씨가 B씨를 덮치려하자 “늙은이를 강간해서 뭐 좋을 것이 있겠나”라는 설득으로 일단 유씨를 진정시키며 시간을 끌었다. 이어 한 순간 숨을 돌린 B씨가 “곧 아들이 들어온다”며 소리치자 유씨는 줄행랑쳤다.정반장은 “이들이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고스란히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라 전했다.또 유씨를 검거하는 데 있어서의 뒷 얘기도 눈길을 끈다. 이미 밝혀진대로 경찰은 유씨의 차량을 알아내 유씨의 집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유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유씨의 차량을 수배하는 데에는 피해자의 진술이 큰 힘이 됐다는 후문이다. 정 반장은 “유씨가 달아날 때 타고 간 스펙트라 차량을 한 차례 저지시킨 이웃 주민과 급박한 상황에서도 차량 넘버를 외워둔 피해자측의 공이 컸다”며 겸손해했다.
이수향 thelotu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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