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2비사] 백백교 살인사건 3
[대한민국 12비사] 백백교 살인사건 3
  • 이수광 작가
  • 입력 2013-01-29 10:36
  • 승인 2013.01.29 10:36
  • 호수 978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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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살인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폭압통치에 시달리던 가난한 민중에게 희망은 사치에 불과한 듯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을 꿈꾸게 해주는 이가 등장했다. 그는 바로 백백교 교주 전용해였다. 신선의 땅에서 불로장생한다는 백백교의 달콤한 교리는 한 줄기 구원이고 희망이었다. 그러나 백백교에 끌려온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부인과 딸을 교주에게 바쳤다. 교주 전용해의 행태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한 번은 전용해의 첩 중에 최인자가 갑자기 발광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안방에서는 전용해가 어린 소녀를 겁탈하고 있었다. 남자를 처음 받아들이는 소녀의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왔다.

“호호호!”
그때 최인자가 안방을 쏘아보면서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여자들이 깜짝 놀라서 일제히 최인자를 쳐다보았다. 최인자는 숨 막힐 정도의 적막을 깨트리기라도 하려는 듯 잇달아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이년이 미쳤나?”
당황한 여자들이 최인자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최인자는 그녀들을 뿌리치고 더욱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인자는 왜 광기에 사로잡혀 웃었을까? 실은 최인자도 몇 달 전에 소녀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백백교에 입교했으나 남편은 다른 곳에서 생활하게 되고 자신은 교주 전용해에게 바쳐졌다. 최인자가 저항하자 벽력사들이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전용해를 자신의 몸속에 받아들이고 그의 첩이 되었다.
“거기 북두사자 있느냐?”
안방에서 전용해의 서늘하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마당에 있던 김서진이 황급히 대청으로 뛰어올라왔다.
“북두사자는 저 계집년을 조용하게 해라!”
“예!”
김서진이 머리를 재빨리 조아리면서 대답한 뒤에 최인자의 가슴팍을 무지막지한 발길로 내질렀다. 최인자가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김서진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최인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댔다.

그때 전용해가 안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고얀 계집이로다. 대원님이 거룩한 행사를 치르는데 이 무슨 소란이냐? 다시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해라!”
전용해의 눈이 핏빛으로 이글거렸다.
“예!”
마당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최인자가 질질 끌려 내려오자마자 닭 모가지를 움켜잡듯이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졸랐다. 최인자가 위기를 느끼고 격렬하게 몸부림을 쳐댔다. 상주(喪主)는 김서진이었고 상여꾼들은 김군옥·이창문·이창흡·이한종·백의식 등이었다. 상주는 직접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자를 말하고 상여꾼은 상주가 살인하기 쉽도록 팔다리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다. 손발을 무섭게 경련하던 최인자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혀를 길게 빼물고 죽었다.

백백교의 평신자들은 기도를 하고 일을 하지만 간부들은 오로지 환락에만 몰두했다. 낮에는 평신자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에 골몰하고 밤에는 술과 여자에 파묻혀 지냈다. 때때로 평신자들을 겁주기 위해 일부로 살인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백백교가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라고?

백백교가 민족종교 동학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백백교의 모태인 백도교는 교주 전용해의 아버지 전정예가 만든 종교다. 전정예는 한때 동학에 가입하긴 했지만 백도교를 만들면서 동학의 정신을 이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동학은 조선 후기의 철종 때에 창립되었다. 철종 때는 누대에 걸친 부패와 흉년으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고 서학(西學)이 들어와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민초들은 관리들의 탐욕과 흉년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불교나 유교는 이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동학을 일으킨 교주 최제우(崔濟愚)는 경북 월성군 가정리(柯亭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신라 말기에 이름을 떨치던 최치원의 후손으로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崔沃)은 도학자(道學者)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최제우는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0년 후인 16세 때에 다시 아버지를 잃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실정을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임금 같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 같지 못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같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 같지 못하다. 이 세상은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이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구한말의 세태를 한탄한 그는 오랫동안 도를 연구해 인내천(人乃天)을 깨달았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의 도는 천도(天道)다”라고 말한 뒤, ‘학(學)은 동학(東學)’이라고 내세웠다. 동학은 그 후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신자들이 늘어났고 철종 13년에는 호남과 기호지방까지 휩쓸어 경주 감영에서 최제우를 체포해 문초했으나 신자들이 수백 명씩 몰려와 항의하는 바람에 석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정과 유림의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대원군은 경상 감사에게 동학을 엄중히 다스리라고 지시했다. 1864년 3월, 대원군의 명에 의해 경상 감사는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를 이유로 들어 대구 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최제우의 목을 벴다. 그리고 그의 목을 효수하고 동학 접주들(接主, 동학의 우두머리들)을 귀양 보냈다.

동학은 제2대 교주인 수운 최시형에 의해 더욱 발전하고 제3대 교주인 손병희는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33인 중 한 사람이 되어 더욱 명성을 떨쳤다. 이처럼 동학은 힘 있는 자들이 아닌 힘없는 자들을 위한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보다 더 열심히 ‘인간 구원’을 추구했던 것이다.

반면에 전정예는 동학에 가입해 잠시 활동하다가 곧바로 탈퇴했다. 전정예는 백성을 구원하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동학에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정예는 자신이 금강산에서 수도했다고 주장하면서 무지몽매한 농민들을 신도로 끌어들였다.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제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조선의 농민들은 유리걸식을 하거나 일본인의 소작농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기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정예는 굶주리고 핍박받는 농민들에게 자신을 믿으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병들지 않고 늙어 죽지도 않는다는 말로 현혹해 교세를 확장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체념하던 농민들에게 그의 말은 에덴동산의 선악과와도 같았다. 1915년에서 1920년까지 전정예가 만든 백도교는 신자가 1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교주 전정예는 남자 신도들에게는 재산을 바치게 하고 여자 신도들에게는 몸을 바치게 했다. 그는 축첩과 살인을 밥 먹듯이 했다. 단식기도를 한 여자 신도들이 기진맥진 쓰러지면 강제로 욕심을 채웠다. 그런 전정예는 1920년 63세에 병으로 죽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정예가 죽자 백도교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큰아들 전용주는 인천교를 창립하고 작은 아들 전용해는 백백교를 창립했다. 그러나 전용해를 따르는 신자들은 많지 않았다.

전용해는 형식적으로 아버지의 친구인 우봉현을 교주로 내세웠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백백교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강원도로 잠적했다. 그러고는 증거가 드러날까 봐 우봉현을 살해했다. <다음호에 계속>

* 위 내용은 <대한민국 12비사>(이수광 저, 일상과이상 간)의 일부 내용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책 속에 있습니다.

이수광 작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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