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한진]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1-29 10:33
  • 승인 2013.01.29 10:33
  • 호수 978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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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혈관 육·해·공 시대를 열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일곱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육·해·공 시대를 연 한진그룹이다. 

글로벌 종합 물류기업인 한진그룹을 일군 창업주 정석(靜石) 조중훈 회장은 일평생 ‘수송외길’을 걸었다. 그의 경영철학 역시 ‘수송보국’이었다. 이 같은 경영철학에 따라 그가 평생 흘린 땀은 대한항공이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항공사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양분이 됐다. 또한 한진해운이 국내 최대 해운사로, 주식회사 한진이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지지대가 됐다.

조중훈 회장은 1920년 2월 11일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4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 토박이인 조 중훈 회장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1930년대 부친의 직물점이 부도를 맞으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됐다.

당시 조중훈 회장은 다니던 휘문고보(현 휘문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국비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 고베에 있는 조선소 수습생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의 짐을 덜어 드리고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1940년 조선소 수습기간을 마치고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받은 조중훈 회장은 일본 화물선을 타고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는 ‘수송’과 인연을 맺고 사업적인 감각을 익힐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조중훈 회장이 수송사업에 뛰어든 것은 1945년 11월 한진상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그는 수많은 업종 속에서도 ‘교통과 수송이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운수업을 택했다고 한다.

이후 조중훈 회장은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1967년 7월에는 자본금 2억 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해운업에 진출했으며, 그해 9월에는 해운업을 하는 데 있어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또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학교법인 인하학원(인하대)을 인수했다.

그리고 1969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 당시 만성적자를 내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주식회사 대한항공을 출범시켰다.

숨 가쁜 그의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1977년 경영난을 겪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한 그는 1987년 대한선주와 인수·합병했다.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한 한진해운은 2년 만에 경영정상화를 이뤄 재계를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항상 ‘수송보국’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조중훈 회장은 항공사 경영을 쌓으며 국제인맥을 이용해 민간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 중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1970년 포항제철 건립을 위한 지원활동 등이 대표적이다.

또 프랑스와의 외교는 국익을 위해 막 개발된 에어버스 항공기 6대를 구입한 것을 인연으로 20년간 한·불 경제협력위원장을 맡아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와 경제교류에 앞장섰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조중훈 회장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를 받는 등 독일·오스트리아·네덜란드·벨기에 등 각국으로부터 9개 훈장을 받았다.

조중훈 회장을 이야기할 때 항상 따라붙는 단어는 ‘수송’과 ‘신뢰’다. ‘수송’은 그가 평생을 걸어 온 길이고, ‘신뢰’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가치다. 특히 그가 말한 신뢰는 남에게서 받는 것은 물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모두 의미했다. ‘난 할 수 있다’는 확신,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가 맞았던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잘 만들어진 예술작품이 후대에도 존경받듯 사업도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오늘날 자산 29조 원, 연간 매출액 21조 원으로 재계 9위에 오른 한진그룹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 이은 ‘국격 높이기’

조중훈 회장의 장남이자 현재 한진그룹을 이끌고 있는 조양호 회장은 아버지의 창업정신을 이어받아 한진그룹을 세계 최고 수송 물류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대한항공 항공기는 이미 하늘을 나는 ‘한국 홍보대사’다. 특히 대한항공 비빔밥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꼭 먹어봐야 할 유명 음식이 됐다. 2010년 3월 독일에서 열린 ‘국제관광박람회(ITB) 2010’에서는 기내식으로 나오는 비빔밥 시식행사를 가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현재 세계 3대 박물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한국어 서비스는 조양호 회장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세계 유명 관광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가 없어 늘 안타까웠다는 그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영국 대영박물관·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자국어로 작품을 안내 받을 수 있도록 멀티미디어 가이드 서비스를 후원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이 박물관에서 한국어로 작품 설명을 듣는 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곳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새삼 높아진 우리나라의 위상을 느끼며 자부심을 갖는다. 박물관 한국어 안내 서비스 후원은 세계 3대 박물관에 이어 지속적으로 확대돼 나갈 전망이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인들로부터 사랑 받고 가치가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추가 후원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나가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제 조양호 회장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민의 숙원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30억 원을 쾌척했으며, 2010년 2월에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밴쿠버에 개설된 ‘코리아하우스’ 개관식에 참석해 이곳을 방문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및 국제 연맹 관계자들에게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적격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홍보했다.

조양호 회장은 2010년 4월부터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2011년 7월 해외 IOC위원 득표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올림픽 유치활동에 보다 더 집중하기 위해 회사 내 의사결정 체제를 자신이 부재중이라도 시스템에 의해 원활하게 가동될 수 있도록 총괄사장 이하 각 부사장들이 운영하는 책임경영 체제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평생 신념 ‘인재경영’

인하대학교 정석학술정보관 1층 로비 한 켠에는 ‘종신지계 막여수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평생 살면서 가장 뜻있는 일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다. 중국 고서 관자에 나오는 이 명언을 조중훈 회장은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조중훈 회장은 생전에 인생경영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8년 인하학원을,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했다. 정석학원에는 한국항공대학교와 정석항공공업고등학교가 있다.

조중훈 회장은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인하학원을 인수할 당시를 떠올리며 “한일개발 설립과 인천 민자 부두 건설 계획 등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사학운영은 감히 생각도 못할 시기였다”면서 “하지만 평생토록 좋은 일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마음으로 (사학운영을)맡아 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하학원을 인수한 그는 가장 먼저 학교 주변을 정리했다. 교정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무허가 주택에 일일이 이주비를 보상해줬다. 또 시유지였던 돌산을 깎아 중·고등학교를 신축해 화제가 된 바 있다. 2년여 간의 신축공사 기간 동안 조중훈 회장은 매주 공사현장을 찾아갔을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조중훈 회장은 당시 쉽지 않은 공사를 강행했던 이유에 대해 “모름지기 공부를 하는 학생은 높은 이상을 갖고 보다 넓게 세상을 봐야 한다”라면서 “시야가 탁 트인 높은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부하는 것과 빌딩의 정글 속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공부한 학생들과는 호연지기가 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인재경영과 관련해 “사학을 운영하는 목적은 육영사업의 보람을 찾는 데 그쳐야지 일시적으로 반짝 광이나 내고 보자는 식의 자기 과시적인 지원이나 당장의 과실만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해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조중훈 회장이 인재육성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돈이 없어 교육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국비 교육기관이었던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17살에 일본 고베에 있는 조선소 수습생으로 발탁돼 약 3년간 주경야독을 했기 때문이다.

조중훈 회장은 스스로 느낀 바를 직접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한 직원들이 갖고 있는 만학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1988년 한진산업대학(현 정석대학)을 개설했다.

한진산업대학은 2년 동안 8학기를 수료하는 과정으로 3개월 단위로 연속해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산업대학을 수료한 직원들은 모두 대졸 학력으로 인사를 반영하고 있다. 현재 한진산업대학은 2000년 정석대학으로 새롭게 개교해 지금까지 명백을 이어오고 있다. 정석대학은 2002년 95명의 첫 졸업생 이후 2010년까지 총 806명이 졸업했다. 정석대학 전신인 한진산업대학 졸업생 2429명을 포함하면 총 3235명이 학사 졸업생이 됐다.

조중훈 회장은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 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했다. 그 중 500억 원은 수송·물류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현 일우재단)등 세 곳에 나눠 전달됐다. 인하학원기부금은 조 회장이 생전에 애착을 보였던 최첨단 전자도서관인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 건립 기금으로 사용됐다.

‘평생교육·평생직장’ 실천

한진그룹의 사내대학인 정석대학이 2010년 4월 6일 제9회 졸업식을 가졌다. 이날 졸업식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본수 인하대학교 총장, 여준구 한국항공대학교 총장, 박춘배 인하공업전문대학 총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석대학은 ‘평생교육, 우수인재 양성’ 이라는 정석 조중훈 회장의 뜻에 따라 지난 1988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사내대학 ‘한진산업대학’을 모태로 한다. 한진그룹은 1999년 4월 학교법인 한진학원을 설립해 같은 해 8월 정부로부터 학위 인정 사내 기술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2000년 ‘정석대학’을 개교했다.

정석대학은 일반대학 과정에 해당하는 ‘학사학위(경영학·산업공학·항공시스템공학)’와 전문대학과정인 ‘전문학사학위(항공시스템공학)등 4개 과정을 2년제로 운영하고 있다. 2010년에 정석대학은 학사과정 64명, 전문학사과정 17명 등 총 8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양호 회장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정석대학 졸업식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아버지의 인재경영이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졸업식에서도 조양호 회장은 졸업생들과 함께 학사모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편, 한진그룹은 정석대학 운영비 및 재학생 학비 전액을 무료 지원하고 있으며, 졸업생에게는 성적에 따라 1~2호봉씩 승급 혜택을 주는 등 기업 차원의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 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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