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지구 경도의 기준점인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고, 한국에는 이에 상응하는 신라시대의 천체관측소인 첨성대가 있어 그같은 이름을 지었다.인도·베트남 방문 당시엔 ‘보리수’가 암호명이었는데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로,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득도(得道)했다 해서 그렇게 붙였다. 또 모스크바 방문은 ‘코스모스’ 행사였는데,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먼저 코스모스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 시점인 9월에 피는 꽃이다. 이와 함께 코스모스는 ‘우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때 한·러간 우주과학 기술 분야 협력이 중요한 합의 사항이어서 이에 착안한 것이다.
2003년 2월 취임 이후부터 지난 해까지 모두 10차례 해외순방을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10일 독일과 터키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물론, 이번 일정에도 별도의 행사명이 붙었지만 대통령이 귀국하기 전까진 보안 사항이다. 노 대통령의 올해들어 첫 해외순방을 계기로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여행 모습을 살펴본다.대통령이 해외로 나갈 때는 보통 100명 이상의 공식·비공식 수행원들과 확인되지 않는 수의 경호원들, 그리고 60~80명 가량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함께 출국한다.이들과 별도로 경제단체 대표와 기업인들이 현지투자, 경제협력 등의 명분으로 동행하곤 한다.특히, 과거에는 기업인들이 대통령의 해외순방 수행을 ‘눈 도장’을 찍는 기회로 여겨 수행경제인단에 포함되기 위해 로비를 벌이곤 했다. 반면, 청와대 입장에서는 기업인들을 수행시켜 청와대 수행원들의 술값이나 기자 접대비 등 비공식적인 비용을 충당케 했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행경제인단’이 구성됐다.
기업인들 눈도장 절호기회로 여겨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 경제단체장이나 기업인들이 돌아가면서 저녁 술 자리를 마련해 놓고 수행원과 기자들을 초청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 않았다.국민의 정부 시절 탈세 혐의로 국세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있던 모 기업인은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캐나다 방문을 맞아 어렵게 수행단에 끼여든 뒤 청와대 참모들이나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술상무’를 대동하고 나타나 극진한 접대를 했다.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처를 부탁한다”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에 구속됐다. 현정부들어서는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이 지난해 10월 경제인 및 경제단체에 서신을 보내 정부 행사의 비용 문제 및 대통령 해외 순방시 민간기업 참여에 대한 원칙을 밝히는 등 개선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일반민항기 이용 박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전 종영한 TV 드라마 ‘영웅시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초기에 미국·일본 출장을 가면서 일반민항기를 이용한 것으로 묘사됐지만 이후에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박정희 대통령 중반기 이후부터 대통령 일행이 해외로 나갈 때는 별도의 비행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용하는 항공편은 두 가지다.일본이나 동남아 일부 국가처럼 가까운 곳은 대통령전용기를 이용한다. 미국 영화 ‘에어포스 원’(Air force 1)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전용기를 ‘공군 1호기’라 부른다.보잉 737-300 기종인 대통령전용기는 비좁기 때문에 장·차관급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근접 경호요원 등 극소수만 동승하고 나머지 수행원과 기자들은 일반 민항기를 타고 간다.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독일·터키 순방처럼 장거리에는 특별기(전세기)가 동원된다.
대통령특별기는 평상시엔 민간여객기로 운항하다가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이 잡히면 내부를 약간 개조해 전세내는 보잉 747-400 기종이다. 이곳에는 보통 200명선을 넘어서는 수행원, 경호원, 정부 각 부처 공무원, 여당 국회의원 등 정치인, 기자들이 한꺼번에 탈 수 있다.김영삼 대통령 때까지는 전세기로 대한항공(KAL)만을 이용했다.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을 교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시아나의 모기업인 금호그룹이 호남계열이어서 DJ 청와대 비서실이 그렇게 조치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었다.
노무현 대통령부터는 전세요금의 공개 입찰을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개 양대 항공사가 교대로 입찰을 따내고 있다. 대통령특별기(전세기)를 ‘날아다니는 백악관’으로 불리는 미 공군 1호기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집무실과 침실 등을 갖춰 무선 교신, 팩스 전송 등 대통령이 청와대에 남게되는 비서실장 등과 교신을 나누며 집무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대통령특별기에서 대통령 내외는 ‘퍼스트 클래스’, 20명 안팎의 공식수행원은 ‘비즈니스 클래스’, 비공식 수행원들과 기자단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각각 앉는다. 그러나 어느 클래스를 막론하고 특별히 선발된 스튜어디스들의 기내 서비스 수준은 거의 환상적이다.
전용기에 미사일 회피장치 장착
대통령이 타고 가는 비행기를 겨냥한 미사일 공격에 철통같이 대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공군1호기에는 미사일 회피장치들(채프/플레어)이 달려 있어 수차례의 미사일 공격은 피할 수 있다고 한다.전세기인 대통령특별기를 타고 갈 때도 자체 방어력은 미비하지만 영공을 통과하는 해당 국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예고없이 특별기의 기수를 돌려 이라크 아르빌의 자이툰 부대를 방문할 때는 이라크 주둔 미국 공군기들이 호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대통령의 해외순방에는 상당한 국가예산이 소요된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대통령 일행이 외국에 나가면 하루 평균 45억원씩이 날아간다는 비공식 통계가 있다.
이 비용은 청와대 예산이 아니라 외교통상부에서 별도 책정한 예산에서 대부분 처리된다. 그래도 국가간 정상외교를 위해선 이런 여행경비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와 달리 가난한 나라에 갔을 때는 무상원조 약속을 하게 되는데 지난 해 국정감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졌었다.당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2년 이후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하면서 방문국에 무상원조를 해 준 액수가 모두 16개국 6,300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은 3,354만달러(건당 197만달러), 김대중 대통령은 2,675만달러(건당 178만달러)의 무상원조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 등 빈국을 방문했을 때도 아직까지 단 한푼의 무상원조 약속도 하지 않았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이를 두고 “과거 대통령들은 돈으로 때웠지만 노 대통령은 ‘입’으로 때운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외국을 거의 나가보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이번 독일·터키 방문을 제외하고도 10차례에 걸쳐 20개국을 돌았다. 다음 달로 예정된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순방까지 치면 임기가 채 절반도 되기 전에 모두 12차례 24개국을 방문하는 셈이다. 특히 지난해 9월 19일부터 12월 18일 사이에는 국내를 ‘들락거리면서’ 모두 5차례에 걸쳐 14개국을 몰아 도는 강행군을 펼쳤다. 젊은 기자들보다 날렵하게 산을 탈 정도로 강한 체력을 자랑하는 노무현 대통령이지만 이 때만큼은 막바지에 “앞으로 열흘 넘는 순방은 하지 맙시다”라고 참모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의 외국 방문 가운데 가장 신났던 여정은 아마도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일 것이다.그해 12월 8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오슬로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귀로에 1박2일 일정으로 스웨덴을 국빈 방문하기도 했는데, 약1주일 동안 수행원과 기자단 모두 축제 무드였다. 매일 밤 축하 술자리가 이어졌고 수행기업인과 정치인들이 내놓은 두둑한 ‘달러 촌지’가 뿌려졌다. 특히 귀국 길 전세기 안에선 폭탄주가 돌았고, 스튜어디스들의 노래솜씨도 듣는 행운을 누렸다.
YS, 클린턴 외증조부 장례로 5시간 기다려
김영삼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도 평소의 기질대로 행동하곤 해 수행원들을 긴장시켰다. 외국 국가원수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마음에 차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예정 시간을 넘기기 일쑤고, 회담 도중 통역에게 “지금 뭐라카고 있는기고”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한다. 임기 막바지인 1997년 6월 YS는 마침내 해외순방과 관련한 ‘사고’를 쳤다. 당시 IMF 외환위기 직전의 나라 경제는 상당히 어려웠고, 대선을 앞둔 정치상황까지 매우 유동적이었다. 그럼에도 YS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유엔환경특별총회 참석 등을 위해 참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8박9일 동안의 미국과 멕시코 방문을 강행했다.그런데 급하게 마련한 한·미정상회담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외증조부 장례식 때문에 회담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YS는 무려 5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고, 이에 따라 다음 방문지인 멕시코에 현지시간으로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도착하는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범해 버린 것이다.당연히 동행취재에 나선 기자들은 ‘정상회담 애걸’ ‘굴욕 외교’ 등의 기사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청와대 춘추관장인 박영환 공보비서관이 언론보도 태도에 불만을 품고 기자실에서 소란을 피운 뒤 중도에 혼자서 일반비행기편으로 귀국해 버리는 해프닝을 벌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도 해외순방을 많이 다녔지만 딱히 전해지는 일화를 찾기 어렵다. 군 출신답게 해외에서도 정해진 틀속에서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라고 실수나 해프닝이 없지 않았겠지만 현장을 지켜본 참모들은 지금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다.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때 백악관 실내인데도 선글라스를 쓰고 들어가는 ‘촌티’를 냈다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차관을 얻거나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혹은 강대국의 국가원수에게 ‘신고식’을 하기 위해 해외순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IMF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나라빚을 갚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구촌 곳곳을 돌아 다니기도 했지만, 대개는 앞에서 소개한대로 방문국에 무상원조를 수천만달러씩이나 주는 형편이 됐다.또 해외순방 목적도 여러나라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다자간 회의에 나가 우리의 입장을 떳떳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기왕에 하루 45억원의 돈을 써가면서 하는 순방이라면 보다 효율성을 기하는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아울러 2004년 11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이 APEC 참석과 남미 순방을 위해 출국하자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냈던 논평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직무정지 때, 휴가를 갔을 때, 그리고 해외순방 때. 이 세가지 공통점은?”이라고 물은 뒤 “시중에 떠도는 ‘그래도 나라가 조용했던 때’를 가리키는 뼈 있는 농담”이라고 비아냥거렸다.말하자면 대통령이 나라에 별 쓸모가 없다는 얘기인데,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고 없을 때 모두가 하루속히 귀국하기를 기다리는 나라가 돼야 하지 않을까.
유제성<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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