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 상속 마무리…장남은 한푼도 못 받아
동아제약 황태자 횡령 혐의로 실형 선고…경영권은 4남 차지
상속재산 분쟁 겪는 삼성·태광 등도 형 대신 동생이 대권 승계
[일요서울ㅣ강길홍 기자] 재계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장남이 소외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장남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자승계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 LG다. LG그룹의 총수자리는 구인회 창업주에서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 구 명예회장의 장남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져왔다. 특히 구본무 회장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을 양자로 입적해 장자승계 원칙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장남 승계 원칙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차남, 3남은 물론이고, 딸이나 아내가 경영권을 차지하는 경우도 생겼다. 재계의 新풍속도가 되고 있는 ‘장남 수난시대’를 살펴봤다.
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의 유산이 생전의 유언대로 대부분 사회에 환원됐다. 2009년 11월 허 회장이 사망한지 3년여 만에 이뤄진 일이다. 유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법정다툼이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허 회장의 장남인 허성수 전 부사장이 “아버지의 유언장은 거짓으로 작성돼 무효”라며 어머니 정인애씨 등을 상대로 제기한 유언무효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이에 따라 허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670억 원 상당의 주식이 공익재단 등에 기부됐다. 녹십자홀딩스 주식 340만 주는 미래나눔재단으로, 녹십자 주식 110만 주는 목암연구소에 각각 전달되는 등 449만 주(시가 673억 원)가 사회에 환원된다. 허 회장의 부인 정인애씨와 차남 허은철 부사장도 녹십자홀딩스 주식 55만 주를 각각 받았다. 3남인 허용준 부사장은 60만5000주를 받았다. 이들 세 사람은 또 녹십자 주식 2만 주를 각각 상속받았다. 반면 장남인 허성수 전 부사장은 단 한주의 주식도 상속받지 못했다.
허 회장은 2009년 뇌종양 수술을 받은 뒤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고, 장남을 유산 상속에서 배제하고 보유 주식 대부분을 사회재단에 환원하며 나머지는 아내와 2·3남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당시 어머니인 정씨와 장남이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이 사태의 원인이 됐다. 결국 장남이 법원에 유언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1·2심 재판부 모두 정씨의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 재판부도 “이 사건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이 유언취지의 구수 요건을 갖춘 적법·유효한 것으로 판단한 원심 판결은 법리를 오해하는 등의 위법이 없다”고 밝혔다.

제약업계 1위의 동아제약도 부자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강신호 회장의 차남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은 한때 동아제약의 황태자로 불렸지만 결국 동생에게 밀려 동아제약을 떠나야 했고, 재기를 노리던 중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 부회장은 경영에 관심이 없던 형과 달리 일찍부터 동아제약 경영에 참여해 후계자의 길을 걸어왔다. 1987년 동아제약에 입사한 그는 기획조정실 전무, 부사장 등 요직을 거치다 10년 만에 동아제약 대표이사로 승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강 회장이 2004년 강 부회장을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와 관련해 강 회장은 동아제약의 대표 상품인 ‘박카스’가 경쟁사인 광동제약의 ‘비타500’에 밀리는 등 경영 성과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재계에서는 가족 간 비화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강 회장이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차남을 배제하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강정석 부사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서 강 부회장을 내쳤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복형을 밀어낸 강정석 동아제약 부사장은 승승장구했다. 형에 이어 대표이사 자리를 꿰찬 그는 동아제약의 영업, 마케팅 부문에 이어 연구개발까지 총괄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결국 강 부회장은 2005년 6월 동아제약 계열사인 주류유통회사 수석무역으로 자리를 옮겼고 사실상 경영권 승계에서 밀려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강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2007년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하며 아버지를 상대로 표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강 회장의 승리로 끝나면서 기대한 결과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이 일로 강 부회장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동아제약 지분을 전량 매각하며 완전히 물러났고, 이후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게 됐다.
이후 강 부회장은 수석무역을 통해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수석밀레니엄(옛 천년의 약속)과 디지털오션을 인수해 몸집을 키우고, 우리들제약 인수를 추진하며 제약업계 복귀를 노렸다. 그러나 회사가 자금난에 빠지면서 우리들제약 인수에 실패했고, 이로 인해 디지털오션의 자금을 빼돌려 개인 채무를 갚거나 수석무역에 지원하다가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지난해 12월 21일 열린 재판에서는 수의를 입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윤종구)는 100억 원대의 회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기소된 강 부회장에게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각각의 범죄 행위에 대한 유죄가 인정된다”며 “다만 회사 지분과 경위, 피해 회복에 대한 노력 등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밝혔다.
‘장남승계’ 원칙 비껴가는 제약업계
녹십자와 제약업계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대웅제약에서는 삼형제가 차례로 후계자의 후보로 올랐지만 3남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다. 대웅제약은 윤영환 회장의 장남인 윤재용 대웅식품 사장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일찍부터 후계자 구도에서 제외됐고, 3남인 윤재승 부회장이 1995년부터 경영에 참여하면서 대권을 물려받을 가장 강력한 후보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2009년 윤 회장이 돌연 3남을 대웅제약 사령탑에서 물러나게 하고 비주력계열사를 이끌던 차남 윤재훈 부회장을 대웅제약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다. 당시 윤 회장이 ‘차남에게도 기회를 주는 차원’이라는 의견과 ‘의료계와의 갈등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윤 부회장을 낙마시킨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이후 3남의 지주사 지분 축소, 대웅제약 지분 처분 등이 이어지면서 결국 차남에게로 대권이 기울었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차남인 윤재훈 부회장은 국가대표 축구선수 차두리를 내세운 우루사 광고로 매출 상승을 이끌면서 윤 회장의 신임을 키우기도 했다.
잘나가던 차남은 우루사 광고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우루사 광고에 대해 “‘피곤한 간 때문이야’라는 표현이 모든 피로가 간 때문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광고를 내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대권에서 멀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3남 윤재승 부회장에게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윤재승 부회장이 지난해 7월 대웅제약 대표이사로 복귀한 반면 윤재훈 부회장은 현재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재승 부회장은 대표이사로 복귀한 이후 지점장 체제를 폐지하고 회사가 직접 영업팀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영업조직을 개편하는 등 경영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생의 경영권 승계는 재산분쟁의 불씨?
사실 형들을 제치고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다. 故 이병철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차남 故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 이후 퇴진한 이 창업주가 그룹 경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대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이맹희 전 회장은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주를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속내를 자서전을 통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결국 경영권을 차지했고 이후 현재까지 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이병철 창업주가 남긴 차명 재산을 둘러싸고 장남 이맹희 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법적다툼을 벌이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18일 열린 결심 재판에서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이 회장에 대한 청구금액을 4조849억여 원으로 확정했다. 애초 1조 원가량에서 지속적으로 청구 취지를 확장해온 결과다. 이에 따라 이맹희 전 회장 측이 법원에 납부한 인지대 비용만 127억 원에 달해 화제를 모았다. 이번 재판의 선고는 오는 23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다.

그룹 회장이 횡령·배임에 따른 형사재판과 상속재산 분쟁으로 인한 민사소송을 동시에 겪으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태광그룹도 3남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경우다. 故 이임용 태광그룹 창업주는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와 3남3녀를 낳았다. 이호진 회장은 3남3녀 중 막내이지만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손쉽게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이유진씨는 친자확인 소송을 통해 이임용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인정받았지만 경영권과 인연은 없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데 이어 셋째 누나인 이재훈씨와 이복형 이유진씨가 상속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한 상태여서 앞날이 불안한 상황이다. 이 창업주가 1996년 타계한 이후 장남 故 이식진씨는 태광산업 주식 4만6732주(4.2%)와 대한화섬 6만5708주(4.95%)를 상속받았고, 이 전 회장도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주식을 각각 4.2%와 4.95%씩 물려받았다. 그러나 2010년 검찰이 태광산업 발행주식의 약 32%가 공식 상속재산 목록에서 누락돼 차명계좌로 관리되고 있다는 의혹을 포착해 수사에 나섰다.
이 같은 의혹은 이 전 회장이 태광그룹 계열사들의 자산을 자신과 아들 현준군이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자회사들로 빼돌리는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이 이를 알게 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소액주주들을 대표하는 서울인베스트가 집중적으로 의혹들을 제기했고, 결국 이 전 회장의 혐의가 재판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형사·민사 소송을 동시에 겪고 있는 이 전 회장은 재판 결과에 따라 지분 구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이 전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권을 잃은데 이어 대주주 지위도 읽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겔포스로 유명한 보령제약은 장녀가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화제가 됐다. 보령제약의 창업주인 김승호 명예회장은 슬하에 4녀만 뒀고, 결국 장녀 김은선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아들이 없어 딸이 경영권을 이어 받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했지만 동양그룹의 경우 두 사위가 그룹을 나눠 경영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김은선 회장의 아들 유정균씨가 성(姓)을 김씨로 개명하면서 3세 경영을 위한 작업도 진행 중이다. 창업주의 외손자가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정균씨는 보령 지분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보령제약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다. 서성환 창업주는 일찌감치 장남인 서영배 회장에게 태평양개발을, 차남인 서경배 회장에게 태평양을 물려주면서 경영권 분쟁의 씨를 제거했다. 이후 서경배 회장은 태평양의 사명을 아모레퍼시픽으로 개명하고 지금의 위치에 올려놨다. 특히 서 회장은 그룹경영을 총괄하면서도 회장 대신 사장이라는 직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난 1일자로 스스로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다.
서경배 회장은 5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로 아직 후계 구도를 논할 나이도 아니다. 다만 서 회장이 아들 없이 두 딸만 두고 있기 때문에 향후 경영권 향방에 대한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동양그룹과 같은 사위경영이 이뤄질지, 보령제약처럼 딸이 경영권을 물려받을지 쉽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단은 서 회장이 딸들에게 지분을 증여하고 있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준비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서 회장의 두 딸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막내딸인 어머니를 통해 농심 지분도 적지 않게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전선은 설경동 창업주의 3남인 고 설원량 전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고, 현재는 설 전 회장의 아들인 설윤석 사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은 남편인 양회문 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양 전 회장도 양재봉 창업주의 차남이었다.
<강길홍 기자> slize@ilyoseoul.co.kr
영풍제지 이무진 회장, 35세 연하 재혼녀에 통째로 회사 넘긴 사연은? 창업주 본인이 자신의 구슬땀으로 일궈 낸 사업을 자식이 아닌 재혼한 아내에게 넘겨준다면? 그것도 5년 전 재혼했고 나이 차가 35살 이상 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져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일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이무진 영풍제지 회장(80)은 아내 노미정 부회장(45)에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전량(123만여주)을 증여했다. 이 회장은 2008년 35세 연하인 노 부회장과 재혼한 바 있으며, 노 부회장은 지난해 1월부터 경영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풍제지는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액 873억 원에 영업이익 102억 원을 올린 우량 중견기업이다. 이 회장이 평생을 바쳐 이같이 키워온 회사를 두 번째 부인에게 통째로 넘겨 주자 재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회장에게는 장성한 두 아들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아들들에게는 단 한주의 주식도 물려주지 않아 그 배경을 두고 설전이 많았다. 두 아들 모두 과거에 영풍제지 경영에 참여했지만 실패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 원인이라는 평가다. 장남 이태섭 전 사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경영에 참여한 이후 부동산개발, IT회사 등을 인수하면서 사업 확장에 나섰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2009년 장남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차남인 이택노 이사가 등기임원에 올라 경영수업을 받았지만 이 회장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다. 두 아들 모두 탐탁지 않았던 이 회장은 결국 재혼한 아내에게 회사의 경영을 맡긴 것이다. 한편 이 회장이 노 부회장에게 주식을 물려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노 부회장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노미정’이 실시간 검색어로 올라오기도 했고, 영풍제지의 홈페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트래픽이 증가하면서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 <길> |
강길홍 기자 sliz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