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여섯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황량한 모래벌판 위에서 세계 1위로 우뚝 선 종합제철소 ‘포스코’다.
당시 한국 정부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결과로 경제를 낙관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1966년 경제성장률은 10%가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국제차관을 얻지 못해 제철소 건설계획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까지 연기됐지만, 정부는 1966년 초 제철소가 들어설 부지에 대한 기초공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1966년이야말로 한국 정부가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해 차관 협상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 발족
1966년 7월 21일, 일본조사단의 보고서와 세계은행의 보고서를 상세하게 분석한 경제기획원은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세우기 위한 국제 컨소시엄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8개의 세계적인 철강회사에 발송했다.
이들은 미국의 코퍼스,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와 서독의 데마그, 지멘스, 그리고 일본의 야하타 제철, 히다치 조선, 미쓰비시 전기 등이었다.
공문은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에 대해 정부가 갖고 있는 청사진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것으로, 연산 1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2단계로 나누어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제1단계는 50만 톤 규모로 1966년에 시작하고, 제2단계는 1970년에 시작하는 건설계획으로서 총건설자금 1억6250만 달러 중 2350만 달러는 내자로 충당하고, 나머지 1억3900만 달러는 외자로 충당한다는 골자였다. 또한 미국 코퍼스 회사의 포이 회장이 주도해 1966년 9월 15일까지 국제 컨소시엄을 정식으로 결성할 것이며, 가능하면 세계은행 차관을 신청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포이 회장은 컨소시엄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계획된 예정일을 넘겼다. 10월이 되자 포이 회장은 참가 예정인 철강업체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컨소시엄 결성을 위한 회의를 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철강회사들은 뜻밖에도 컨소시엄 구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현재의 한국 경제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제철소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컨소시엄 참가에 부정적인 뜻을 나타냈다. 포이 회장과 다른 회사들이 계속 컨소시엄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자 일본 기업들은 공식적으로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 정부는 일본 철강회사들의 불참 의사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철강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해 고무적인 보고서까지 작성했던 것이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했으나 미국 중심으로 프로젝트가 돌아가는 데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불참이 확실해지자 경제기획원은 포이 회장에게 일본을 대체할 만한 국가를 물색, 참가 의향을 타진해 보라고 촉구했다. 얼마 후 영국과 이탈리아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66년 12월 10일 피츠버그에서 4개국 7개사가 모여 첫 번째 공식회의를 개최하고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ion·한국국제제철차관단)를 정식 발족시켰다. 첫 모임에서 KISA는 제1단계 공사의 건설비용, 자금조달 방법, KISA의 대표 등 3가지 안건을 토의했다.
KISA는 제 1단계 공사자금을 총 1억2500만 달러로 추정하고 그중 2500만 달러는 내자로, 나머지 1억 달러는 국제차관으로 충당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포이 회장을 KISA 대표로 선정했다.
KISA는 1967년 1월과 3월에 다시 모여 계획을 보다 구체화시키는 한편 프랑스의 앤시드를 참가시키고 소요자금 조달계획을 확정했다. 즉 국제차관 조달 몫 중에서 미국이 30%, 서독이 30%, 이탈리아가 20%, 그리고 영국이 20%를 분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3월 회의가 끝나자마자 KISA를 대표해 코퍼스는 일단의 기술자와 전문가를 한국으로 파견해 종합제철소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심층적으로 조사·분석했다. 이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KISA는 1976년 4월 6일 한국 정부에 예비제안서를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제철소를 2단계로 나누어 건설하되 첫 단계 50만 톤 규모의 제철소는 1억5000만 달러의 공사비용이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추정치보다 2500만 달러가 더 많았다.
한국 정부는 KISA의 예상추정비용이 지난번 일본조사단의 추정치보다 너무 높아 깜짝 놀랐다.
한 번에 1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지을 경우 일본 조사단이 추정한 총비용은 1억8700만 달러로 그중 2500만 달러를 내자로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2단계로 나누어 제철소를 건설하는 데 따르는 추가비용을 감안하더라도 KISA의 견적은 약 35%나 비싼 것이었다. 경제기획원은 일본의 타당성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제1단계 건설비용을 1억 달러로 계산하고자 내자 1000만 달러, 외자 9000만 달러를 동원할 예정이었다.
사실상 KISA의 건설 예정 가격이 너무 비쌌던 것은 몇 개월 후 UNDP(국제연합개발)가 실시한 타당성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됐다. UNDP는 1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두 단계가 아닌 한 단계로 건설할 경우 총 비용의 30~35%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건설비 이외에도 KISA가 제출한 예비제안서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국제차관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기돼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능보장, 제품계획, 건설계획과 설계, 기술제공, 장비구매 등에 대한 책임과 절차도 자세하게 기술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기획원은 예비제안서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고 기본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KISA 측에 전했다.
박태준, 포항제철의 실수요자로 선정
8월 초 박정희 대통령은 KISA와의 실무협상 총책임자인 황병태 경제기획원경제협력국장으로부터 진척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정부는 피츠버그에서 있을 KISA와의 협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최종적으로 결정하고자 했다.
박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는 동안 어떤 기관에 종합제철소 프로젝트를 맡기는 것이 좋을지 배석한 경제부처 장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지금까지는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협상을 주도해 왔으나, 실제적으로 공사가 시작되면 민간기업이 프로젝트를 맡아 책임지고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내 생각에 제철소 건은 대한 중석(사장 박태준)에 맡겼으면 좋겠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박 대통령은 배석한 장관들을 둘러보면서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어느 장관도 선뜻 의견을 내지 않았다.
“재정이 빈약한 정부가 건설 재원을 마련하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반면에 대한중석은 2년 반 동안 박태준 사장이 경영을 잘한 결과 재무상태가 매우 건실해졌습니다. 막대한 자금이 축적돼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자금을 잘 이용하면 종합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 확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압니다. 더구나 박 사장은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리더쉽과 뛰어난 경영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대한중석에는 그동안 박 사장이 축적한 경험과 전문지식을 두루 갖춘 훌륭한 관리자와 기술자가 많아 이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배석한 장관들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통령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박태준 사장은 일본 철강산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며, 가와사키 제철의 니시야마 사장을 비롯해 일본 철강업계 전문가들과의 교분도 두텁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미 제철소에 대한 연구와 예비건설계획을 검토해 왔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박 사장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박 대통령이 박태준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뛰어난 능력과 강한 추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년 동안 그를 측근에 두고 일을 시켜본 결과 박 대통령은 박태준이라면 반드시 종합제철소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 참석한 대부분의 장관들도 박태준이 종합제철소 프로젝트를 완수할 적임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런던으로 날아온 전보
1967년 9월 5일, 런던 메탈 마켓 센터에서 중석판매 협상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박태준 사장은 고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그것은 장기영 부총리의 지시 내용을 대한중석의 고준식 전무가 받아 정리해서 띄운 전보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의 책임자로 선정되었음. 박태준 사장은 종합제철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음. 이 전문을 받는 대로 즉시 귀국 바람.’
전보에는 세 가지의 주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첫째, 대한중석은 외국차관 협상과 교섭 문제를 관장한다. 둘째, 정부 보유 주식에 대한 배당은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전용키로 한다. 셋째,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의 내자 충당분을 충분히 조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머지를 정부의 재정자금에서 충당키로 한다.
박태준은 전보 내용에 대해 깊이 숙고한 다음 비서에게 말했다.
“대한중석이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종합제철소 건설의 모든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된다.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우리가 모두 책임져야 할 것이다.”
박태준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종합제철소 추진위원장에 임명된 것을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대통령이 불가능한 과업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박태준은 이제 막 마흔이 되는 나이였다. 공자가 불혹이라 일컬었던 나이에 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연의 일치를 좋은 징조로 여기고 운명이 자기를 선택해서 이 일을 맡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다. 너희들이 내게 불가능한 일을 맡기는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 성사시키겠다. 그래서 나라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다.’
박태준은 앞으로 부딪혀야 할 문제들을 직시했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자금조달 문제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국제금융기관들은 한국 경제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대규모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 추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 확보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전무에게 회신을 보냈다.
‘정부가 제시한 내용대로 라면 그 일을 맡겠음. 그러나 당장 귀국은 불가능함.’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대표해 중석을 판매하고자 런던에 나와 있었다. 중석 구입을 희망하는 국가들과 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대한중석의 내년도 판매계획을 아직 확정지을 수 없었다. 또한 귀국하기 전에 사장으로서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그는 9월 30일이 돼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KISA와 합의각서 체결
장기영 부총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1967년 9월 25일, 코퍼스의 샌드빅 부사장과 세 명의 KISA 대표들이 기본계약서 수정 초안을 가지고 협상하러 한국에 왔다.
수정 초안에 따르면, 1억3070만 달러를 투자해 제1단계로 연산 6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되, 한국은 3500만 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9570만 달러는 국제차관을 통해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생산규모는 처음에 제시한 것보다 20%나 늘어난 반면 건설비용은 약 20% 줄어들었고 1972년 9월에 제1단계 공사를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약서 수정 초안과 함께 샌드빅 부사장은 세계은행 보고서를 가져왔다.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종합제철소를 건설할 때 유의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첫째, 두 단계로 건설할 것. 둘째, 계약 수행을 위해 국제적인 컨설턴트를 고용할 것. 셋째, 최근에 제철소를 지은 터키, 브라질, 인도 등을 견학할 것. 넷째, 제철소의 가동 초기에 원활한 운영을 위해 외부기관과 관리용역 계약을 맺을 것.
경제기획원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원안보다 조건이 많이 좋아진 수정 초안에 다소 고무됐다. 그러나 KISA의 수정 초안은 자금 조달의 원천, 규모 및 조달 시기에 대해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즉 외부 자금 조달이 잘 안 될 경우 KISA는 아무런 책임 없이 계약을 해약할 수도 있다는 조항이 삽입돼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가능하면 외국정부와 국제금융기관이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8개 참가회사가 책임을 지고 소요자금을 조달한다는 보장을 받고 싶어 했다.
이외에도 KISA초안에는 불분명한 조항들이 있어서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경제기획원은 일부 조항에 대해 불만족스러웠지만, 전반적인 추진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일단 기본계약에 대한 합의각서를 체결한 다음 자세한 사항은 후에 거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1967년 9월 28일, 드디어 KISA와 한국 협상대표는 기본계약서의 합의 각서에 서명했다.
유럽에서 귀국한 박태준은 3일 앞으로 다가온 포항 종합제철소 건설 기공식을 앞두고 온 나라가 들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장기영 부총리실로 불려갔다. 부총리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박태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 후 자신이 서명한 KISA와의 합의각서에 서명하라고 펜을 건네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철강왕 박태준│서갑경 지음│한언 출판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