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롯데 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1-08 10:55
  • 승인 2013.01.08 10:55
  • 호수 975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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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명성, 국내서도 통하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다섯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유통업의 선두주자인 기업 ‘롯데’다.

추잉껌으로 성공한 신격호는 1960년대 일본에서 한창 사업을 번창시킬 때 소비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이 시기야말로 초콜릿 생산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초콜릿 시장 제패에 나선 신격호는 롯데의 중견 간부인 노나카와 오토모리를 유럽에 파견하며 이렇게 말했다.

“껌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할지라도 추잉껌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다. 껌만으로 사업을 유지한다는 것은 향후 5년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초콜릿 시장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국제 수준의 신제품을 만들어 경쟁사인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앞서야 한다.”

껌의 언덕 넘어 초콜릿 고지로

‘맛의 예술품’이라 불리는 초콜릿 기술은 까다로운 동시에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원료인 카카오두·카카오 버터·밀크·설탕의 조합과 그 변화에 의해서 같은 이름의 초콜릿이라도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맛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신제품이 나올 때는 포장부터 라벨 디자인까지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여기에 일본 초콜릿 시장의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원래 초콜릿은 온도에 민감해 섭씨 28도 이상의 고온에서 표면이 녹아 지방분 때문에 허옇게 굳어 버린다. 일본의 여름이 싱가포르와 비슷하게 무더운데다 습도까지 높아서 초콜릿 판매에 어려움이 따랐다.

당시 일본의 초콜릿 시장은 매년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9개월간 승부를 냈다. 때문에 각 초콜릿 회사들은 가을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신제품을 던질 것인지, 온갖 비장의 기술을 동원했다. 

신격호 역시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1961년 11월, 노나카와 오토모리와 함께 업계 시찰을 떠났다. 그들은 유럽 각국의 주요 신문에 ‘초콜릿 제조 기술자 구함’이란 광고를 내는 한편, 일류 공장의 현역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롯데 직원들은 노나카와 오토모리의 출장 목적을 잘 몰랐다. 당분간 초콜릿 생산 계획을 비밀에 붙이라는 신격호의 지시 때문이었다. 둘은 휴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기술자와 기계설비를 물색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6개월 이상 경과한 1962년 7월, 초콜릿 신제품의 열쇠를 쥔 기술자로 ‘막스 브락크’를 스카우트 했다. 그는 신격호 보다 한 살 위로 취리히대학 기계학부 출신이었다.

또한 스위스·오스트리아·프랑스 등지의 유명 초콜릿 공장 기사로 활약했으며 공장장 경험도 풍부했다. 브락크의 스카우트는 초콜릿 제조 문제 외에도 최신예 기계설비 도입문제에 있어서도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아직 유럽에서도 가동되지 않은 최신예 기계설비에 관한 연구를 끝내놓고 있던 참이었는데, 기계 설비를 부품상태로 도입해 일본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신격호 사장으로서는 브락크의 스카우트로 최신예설비까지 손에 쥔 셈이었다.

이와 같은 신격호 방침에 따라 원료의 혼합·가공·포장까지 일괄 작업이 가능한 공장이 완성됐다. 경쟁 상대인 메이지와 모리나가 제가와에 비해 5분의 1의 인력으로 가동되는 전자동 설비를 보유하게 됐다. 이로써 후발 롯데가 선두그룹 메이지와 모리나가와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최신예 기계설비가 갖춰진 다음, 가장 큰 일은 새로운 초콜릿 제품의 개발이었다. 유럽의 맛을 담으면서도 일본인의 입맛에도 꼭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몇 차례 시제품 시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1964년 1월 첫 작품을 완성했다. 이름은 현재 한국 시장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이다. 상품명 앞에는 신격호의 아이디어를 살려 ‘스위스의 맛’이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신격호는 제품  개발과 동시에 홍보에도 박차를 가했다. 일주일 단위로 500번의 CM(Co mmercial Message)을 반복해서 흘려보내는 한편, ‘여성 슈퍼백 부대’도 등장시켰다. 이는 아르바이트 여대생 수십 명에게 롯데 초콜릿이 디자인된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들고 거리를 활보하게 하는 것이었다.

배포 큰 사업가로 알려져

이뿐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에 롯데는 연간 140억 엔의 매상을 올리는 대히트 제품 ‘VIP 초콜릿’을 발매했다. VIP초콜릿은 수분이 다량 함유된 생크림으로 만든 것으로 당시 일본 과자업계에서는 수분이 3% 이상 포함된 것은 초콜릿으로 부를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롯데는 이 같은 불문율을 무시했고 오히려 그것이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일본에선 신격호라는 이름과 함께 기시 노부스케(1957~ 1960)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일본 수상을 역임한 정계 우파 본류의 거물이었다. 신격호는 기시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브랜드와 함께 일본과자협회를 통한 껌과 과자산업 문제로 기시 수상에게 진정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롯데 단독 행위가 아니다. 원가가 낮은 미국 껌이 상륙해 와서 과자업계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탕의 높은 가격을 막기 위해 수입 자유화를 촉진해 달라고 힘이 있는 기시 선생 쪽에 진정했던 것이다.”

당시 기시는 신격호를 일본인이라고 차별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다해 성의껏 도와줬다고 한다. 그 바람에 신격호는 다른 동종업계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신격호는 한국과 일본의 돈독한 우호 관계를 누구보다 원했다. 그것이 롯데의 존립과 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하토야마 내각 무렵부터 고노 이치로, 이시이 코지로 등 일본 정계 실력자들에게 상당한 정치현금을 쾌척한 배포 큰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한일 우호 증진과 그것을 축으로 한 롯데그룹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두 가지였다.

국내에 상륙한 ‘롯데호’

1976년 신격호는 기존의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하고 새로 자본금 3000만 원을 투입해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롯데그룹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신격호는 한국 롯데 사장을 맡으면서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는 유창순씨를 추대해 롯데제과의 경영을 맡겼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유창순 회장은 1950년 9월 맥아더 사령부에서 찍어 낸 한국 화폐의 운송 책임자로 선임됐고, 이런 인연으로 이듬해 10월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도쿄지점에 약 2년간 근무하면서 재일 한국인 사업가 신격호를 큰손 예금주로 만났다.

당시 관계· 재계· 정계에 폭넓은 대인 관계를 가진 유창순은 회장 취임 이후 14년 동안 한국 롯데 성장의 큰 기둥 역할을 했다. 그는 참으로 유능한 경제인이었고 양심적인 기업인이었다. 그는 회사의 전반적인 진로, 자금 안배, 대외적인 업무를 맡았다. 1980년대는 5개월간이지만 제15대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설립 당시 롯데제과는 기능직 사원 350명과 일반직 사원 150명, 모두 합쳐봐야 5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 롯데의 후광을 업고 출발한 명성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한 모습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롯데는 연간 매상 400억 엔으로 일본의 2대 종합과자 메이커인 모리나가와 메이지를 앞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때가 신격호의 전성기였고, 그의 가슴에는 ‘희망’이라는 온천수가 펑펑 치솟아 올랐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내 최대 식품 기업군

설립 초기 2년 동안 롯데제과는 제1공장과 제2공장뿐이었다. 종전 (주)롯데 자리에 있던 제1공장에서는 껌을, 롯데화학공업사 자리(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제2공장에서는 빵·비스킷· 캔디·캐러멜을 생산했다.

초창기부터 생산 제품의 판매가 호조를 보였다. 이에 따라 롯데제과는 영등포구 양평동의 대지 1만1880㎡(3600평)에 건물면적 6600㎡(2000평)의 공장을 신축했다. 1969년 2월에 준공된 영등포 공장에서는 세계적인 캔디 기술자 크라이텐(독일인)이 생산에 참여했고, 국내 최초로 위생적인 포장재 셀로판지가 사용됐다.

본격적인 껌 생산 설비를 갖추고 출범한 롯데제과는 1967년 ‘쿨민트껌’과 ‘바브민트껌’을 발매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오렌지볼껌’은 포장지를 벗기면 모양과 색깔이 오렌지를 닮아 ‘황금의 과일껌’으로 불렸다. 특성도 다양해 향미는 드롭프스와 같고, 깨물면 코팅이 벗겨지면서 캐러멜과 비슷한 감축으로 씹혔는데,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풍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롯데는 롯데제과의 유례없는 성장을 바탕으로 청량음료, 아이스크림, 햄, 우유 업종에 진출해 국내 최대의 식품 기업군으로 자리 잡았다. 1974년 12월 칠성사이다와 1978년 2월 삼강 하드아이스크림을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개편하고, 1978년 1월 한일향료(지금의 롯데식품)와 1978년 4월 롯데햄우유를 설립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패스트푸드 업체인 롯데리아를 설립했다.

특히 1970년대 롯데 도약의 하이라이트는 ‘호텔롯데’의 건설이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관광진흥정책에 따라 반도호텔·아서원·국립도서관 땅을 사들여 지상 38층, 지하3층, 객실 1020개 규모의 초대형 관광호텔을 1975년에 착공, 1979년 10월 완성했다.

호텔롯데 오픈에 이어 11월에는 백화점 경영을 위한 롯데쇼핑을 설립함으로써 롯데그룹은 국내 유통·서비스 산업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1978년 9월에는 마산의 관광호텔 롯데크리스탈을 건설하는 한편, 평화건설을 인수해 ‘롯데건설’로 개편한 뒤 중동 건설시장에도 진출했다.

이에 앞서 1970년 10월 껌과 과자의 포장에 필요한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해 ‘롯데알미늄(주)’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3년 11월에는 공해 방지시설 업체인 ‘롯데기공’과 오디오 생산업체인 ‘롯데파이오니아(現 롯데전자)’를 잇달아 설립했다. 1974년에는 1월 사무기기 메이커인 ‘롯데산업’과 11월에 그룹 무역 창구인 ‘롯데상사’를 발족시켰다. 롯데의 기업 확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79년 1월에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고밀도 폴리에틸렌 생산을 개시함으로써 국가 기간산업에도 참여했다.

롯데제과를 모기업으로 하는 롯데그룹은 1979년 봄 호텔롯데를, 그리고 그해 연말에는 롯데쇼핑(백화점)을 출범시켰다. 박 대통령 시해 쇼크 속에서도 신격호 회장의 모국 투자는 당초 계획대로 진행된 셈이다. 1980년대 들어 그의 투자 의욕과 사업 다각화 노선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1980년에는 식품 저장을 위한 롯데냉동(주)을 설립하고, 사진감광제 메이커인 한국후지필름(주)을 인수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주)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켰고, 광고 대행업체인 (주)대흥기획과 롯데물산을 설립했다. 이어 1983년 롯데 그룹 중앙연구소와 유통산업본부를 설립함으로써 명실 공히 재벌그룹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 같이 쉴 새 없이 확장을 해 온 롯데그룹은 1983년 말 그때 이미 24개 계열사에 종업원 2만 명을 거느린 한국의 10대 재벌그룹에 진입했다. 1983년 매출액은 1조 100억 원. 매출 1000억 원을 넘는 계열사가 롯데제과·롯데건설·롯데쇼핑 등 5개사에 이르렀다. 당기 순이익 330억 원으로 롯데그룹은 국내 재벌그룹 중 수익성 순위에서 상위권을 기록했다. 이처럼 롯데는 꾸준히 성장해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청년 辛格浩, 서진모 지음>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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