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 사귀어온 동성에게 지나친 집착 끝에 동성애인을 감금한 뒤 엽기적인 폭행과 고문을 일삼은 10대 레즈비언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2일. 대구 달서경찰서에서는 평범한 10대 소녀 7~8명이 고개를 떨군 채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사귀는 여성이 다른 여성과 사귄다는 이유로 한 달여간 감금한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금품까지 뺏은 혐의를 받고 있는 H양(19·대구시 달서구)과 친구들이었다.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채팅 사이트를 통해 동성애 파트너로 만난 후 연인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귀던 여성이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에 격분, 자취방에 감금, 담뱃불로 온몸을 지지는 식의 끔찍한 고문 및 폭행,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강요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레즈비언 수면위로…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있는 레즈비언 까페 게시판에는 이땅에서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레즈비언들의 사연이 올라와 있다. 이들의 사연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포함해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애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그동안 몇몇 인권단체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이 많이 누그러들면서 레즈비언들의 온라인 모임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아직까지 타인에게 자신의 성향을 선뜻 드러내는 이들은 드물지만 적어도 온라인상에서 이들은 자유롭다.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동질감으로 모인 레즈비언들은 까페에 가입해 글을 남기거나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도 하는 등 이들의 활동은 음지에서 벗어나 점차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는 실태다.
카페를 둘러보면 레즈비언들의 사랑 및 생활, 사고방식 등 많은 부분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연인의 배신’에 대한 글로서 대부분은 상대방의 변심에 대한 고민과 슬픔이 주를 이룬다. ‘너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다’, ‘OO가 내게 이별을 말했다. 내가 지겨워졌단다…’, ‘하루종일 그녀와 연락이 안돼서 불안해 죽겠다’,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는 식의 글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절대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되찾고 말겠다’, ‘너는 영원히 내것이어야 해…’라는 집착성 글은 물론 ‘차라리 같이 죽고싶다’, ‘복수하고 싶다’는 섬뜩한 내용을 담은 글도 있다.
“이성간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이번 대구에서 발생한 사건은 레즈비언간 ‘잘못된 집착’이 불러온 치정극이다. 이 사건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기사가 보도된 후 인터넷에는 ‘동성애’ 자체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하거나 ‘레즈비언’ 전체를 폄하하는 공격성 리플까지 달리고 있는 실정이다.13일 기자와 만난 레즈비언 A(27)씨는 이번 사건에 대해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가십거리에 오르는 자체가 무척 불쾌하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A씨에 따르면 레즈비언들 간의 치정문제는 이성커플들간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레즈비언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질투를 느끼고 때로는 냉각기를 가지며 밀고 당기는 ‘애정싸움’을 한다. 또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헤어지거나 사소한 오해로 이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개중에는 어렵게 얻은 자신의 사람을 잃을까 걱정한 나머지 과한 집착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또 남녀관계에서도 지나친 간섭과 집착으로 이별을 맞게 되는 경우가 흔하듯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성커플들 간에도 제 3자가 끼인 삼각관계나 질투로 인해 강력 사건이 벌어지는 것처럼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가 저지른 엽기적인 행각에 대해서 A씨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며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또 다른 레즈비언 B(30)씨 역시 이번 사건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동성간이건 이성간이건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단지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자신이 사귀는 상대에게 끔찍한 행각을 저지른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며 “진정한 사랑을 왜곡한 행위”라는 입장을 밝혔다.
“레즈비언을 매도하지말라”
B씨는 “이번에 발생한 사건이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처럼 ‘레즈비언’을 부각시켜 보도된 것은 무척 유감”이라며 “마치 모든 레즈비언들이 병적인 정신상태를 가지고 엽기행각을 하는 이들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에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낀다”고 말했다.이번 사건과 관련, “어느 네티즌이 ‘무서운 레즈비언’이라는 리플을 단 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그는 “문제는 지나친 집착과 소유욕, 삐뚤어진 애정관이지 레즈비언들의 동성애가 아니다”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A씨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든 레즈비언들이 흡연을 즐기고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거나 애정관계에 대해 과민한 집착을 보이는 집단, 혹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A씨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레즈비언임을 자칭하거나 겉멋에 휩쓸려 레즈비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가짜 레즈비언’으로 인해 진정한 동성애가 오해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로 그는 “레즈비언들 중에는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고 싶음에도 ‘아웃팅(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에 의해 레즈비언임이 폭로되는 것)’ 협박으로 질질 끌려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협박은 ‘헤어지자고 하면 니가 레즈비언임을 가족과 주변에 알리겠다’거나 ‘직장에 알려 매장시키겠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그러나 이는 동성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질나쁜’ 일부의 얘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많은 레즈비언들은 사랑을 잃고서도 혼자 끙끙 앓거나 괴로워하는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이들이 많다. 또 자신도 모르게 생기는 집착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A씨는 “레즈비언들도 더 좋은 사람, 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게 되면 흔들릴 수 있다. 굳이 남녀간 ‘바람 피는 것’에 비유를 하지 않더라도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은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그는 “사랑과 집착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레즈비언들도 아는 사실”이라며 이번 사건처럼 일부의 잘못된 행각으로 인해 레즈비언 전체가 매도당할 수 있다는 것에 우려를 표시했다.
# “질투와 집착 이해할 수는 있지만…”
4년간 사귄 동성애인과 이별한 경험이 있다는 B씨는 “세상의 불이 모두 꺼진 느낌… 하늘이 무너져내린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별의 이유는 다름아닌 상대방의 변심. B씨는 “그렇게 사랑하던 애인이 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B씨는 “나 역시 질투와 집착을 경험했기에 그런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그는 ‘죽을 것 같은’ 아픔을 견디면서도 그녀를 보내줬다고 한다. “유치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 “참 많이 싸우고 매달리기도 했지만 이미 돌아서버린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며 “정말 사랑한다면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레즈비언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처럼 변심한 애인에게 가혹한 ‘응징’이나 ‘복수’를 꿈꾸는 ‘독한’ 레즈비언들은 실제로 드물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실제로 지난해 기자가 만난 ‘레스보스’의 김명우(51) 대표는 “레즈비언도 이성커플들이 그렇듯이 집착과 소유욕을 보이며 갈등을 겪는 등 소위 말하는 ‘사랑싸움’을 한다”며 “이성간 사랑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남녀간의 사랑과 본질은 같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허락하지 않는 사랑, 쉽지 않은 사랑을 하는 탓에 오히려 더 간절하고 순수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김대표의 설명이었다.김 대표는 “다만 레즈비언들은 이성 커플에 비해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경로가 매우 제한되어 있고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더욱 애절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별이나 상대방의 변심에 대한 충격도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귀띔했다.
이수향 thelotu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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