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③]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LG③]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2-12-26 09:09
  • 승인 2012.12.26 09:09
  • 호수 973
  • 42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네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특유의 성장모델을 구축한 글로벌 기업 LG다.

▲구본무 회장, LG전자 태양전지 공장 방문

공장 규모와 제품 라인업 등은 사업의 전개 방식 중 하나이다. 따라서 누가 봐도 빈손으로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봉이 김선달 식으로 빈손으로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남다른 전략이 수반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럭키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공장의 입지조건은 물론 미국 현지 주정부의 지원정책 등이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공장설립은 차질을 빚게 되고,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허신구 일행은 LA·샌프라시스코는 물론 일본 내쇼날사가 1950년대 말에 공장을 세운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美 자치령)까지 샅샅이 훑었다. 최종적으로 현지조사팀은 앨라배마 주의 ‘헌츠빌’에 깃발을 꽂았다.

이곳은 주지사(폴 제임즈)가 고용 창출을 위해 해외기업 유치에 적극적이었으며 세금·노동력·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헌츠빌은 미국 인구의 50퍼센트가 하루 수송권내에 밀집해 있고 중남미 직행로인 모빌 항이 인접해 있어, 제3국 수출에 용이했다. 금성사 공장을 유치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손으로 공장을 세운다는 허신구의 계획이 착착 맞아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고용만 해 준다면, 우리 땅에 와서 빈손으로 공장을 세워도 좋다.”

주(州) 발전을 꾀하는 주지사 폴 제임즈의 대답과 함께 앨라배마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공장부지 19만8000㎡(6만 평)을 주정부 재정으로 정지 작업 해주고, 건설자금은 시당국이 산업공채를 발행해 조달해 주는 조건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3.3㎡당 1만 원 꼴인 셈이었다. 전체 80만 달러 보너스로 공장을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해 관세와 쿼터 혜택을 주고 전기·가스·용수 메인배관을 시비(市費)로 건설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떨어지는 격이었다.

이처럼 사업이란 나의 필요가 아닌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것을 금성사 현지법인 설립 과정은 잘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전략과 주도면밀한 현지분석과 행운이 함께 한다.

한국동란 중 미국 GI(美 군인)들이 부산 국제시장 거리를 배회하며 떠들어대던 ‘럭키’라는 단어는 이름에서 처럼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며, 북미 시장에 진출하는 기회를 가져왔다. 바야흐로 글로벌 경영이 시작되는 단초였다.

‘헌츠빌 사태’

사업에서 잘 된다고 안심하는 것은 금물이다. 때로는 갑작스런 역풍이 불어 닥쳐 다른 방향으로 몰아 가기 때문이다.

허신구와 제임즈가 현지공장 설립계획을 발표하기로 한 1주일 전 어느 날이었다. 헌츠빌 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인 미스터 레빈이 전화를 해왔다. 전화통 너머에서 그는 격양된 목소리였다. 불안한 느낌으로 찾아 간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레빈은 자초지종 없이 불쑥 종이를 내밀며 허신구를 노려봤다.

“이게 당신 회사의 실상이오?”

종이에는 1978년 이후 경제 불황에 부진한 국내 전자회사들의 실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국내 라이벌 회사가 레빈을 찾아와 자사에게 유치하라며 금성사를 마구 헐뜯고 갔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분노를 넘어 기가 찰 노릇이었다. 누가 만든 뜬소리이건 럭키의 미국 시장 진출에 뿌린 재는 그 의도가 고약했다.

허신구는 속이 쓰렸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헌츠빌에 입지를 잡은 게 경쟁사를 위협할 정도로 성공적인 전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성사의 위상과 앞으로의 성장성을 점쳐보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당장에 돌연한 문제부터 급히 풀어나가야만 했다.

럭키 현지요원들은 주정부·시(市)상공회의소·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사과했고,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에 진정을 내어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얼마 후 정부 관여로 경쟁사 요원들이 철수함으로써 ‘헌츠빌 사태’는 잦아들었다.

위기를 넘기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게법인 쿠퍼스 앤 리브랜드(Cooper's & Lybrand)가 럭키그룹과 금성사의 연차보고서를 공인해줌으로써 신용을 보장했다. 또한 공채발행 은행은 시티뱅크가 향후 금성사 현지생산법인과의 거래를 트기 위해 지급 보증료를 연 0.5퍼센트에 간사수수료를 1퍼센트로 하되 첫 발행임을 감안해 5만 달러로 깎아 주었다.

금성사의 헌츠빌 진출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1981년 10월 7일 GSAI 준공식에 7인의 ‘럭키 브라더스’가 참석과 6일 후, 뉴욕에서 합작선 및 기술 제휴 선을 위한 ‘럭키의 밤’ 행사가 성대히 치러졌다. 금성사 미국 공장 진출에 허씨는 톡톡히 제 몫을 다 했고 그 공은 동업자와 주주는 물론, LG그룹의 미래로 이어졌다.

똘똘 뭉친 5형제의 단결력

LG는 5.16군사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환수자금 명목으로 안양에 한국케이블(현 LG전선)을 건설해 헌납하게 됐다. 한편, 그에 대한 처벌로 구평회는 고등군법회의에서 6년형을 구형받았다가 6개월만인 1962년 2월 감옥살이에서 선고유예로 풀려남으로써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5.16 시기, 형님을 대신해 감옥에 가는 걸 마다않은 구평회의 우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논외로 치더라도 구씨 집안의 단결력과 집안의 분위기를 읽게 한다. 어떤 식으로든 똘똘 뭉친 5형제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화살 묶음처럼 LG라는 기업의 주춧돌이 됐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차관도입차 곧바로 서독으로 달려갔다. 구평회의 서독행 임무는 아세테이트 섬유 공장 건설을 위한 차관 및 시설재 도입이었다. 아세테이트 섬유는 옷감으로 사용하면 구겨지지 않고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 당시 대인기였다.

5.16군사정부가 종합경제재건위원회를 설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차에 경제주체를 선정하고 자본을 조달하는 핵심과제에 LG도 협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군부와의 악연은 훗날 2대 회장인 구자경 대에까지 이어진다.

‘1976년 7월 1일 현재 주요 기업인 사회활동 현황’을 살펴보면, 구자경 럭키그룹 대표가 전국경제인연합회부회장, 한독경협위위원장직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인이 그만큼 정치권력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얘기이다.

창업자 구인회의 넘치는 사업가적 열정과 투철한 기술 개발 마인드는 오늘날 LG를 있게 한 살아 있는 경영 정신이다. 그러나 LG가 대기업으로 성장해 가는 데에는 보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그것은 정부와 민간 간의 오랜 애증 관계다. 1960년 초의 이 같은 상황은 한국 재벌 기업들이 이후 완전히 자리 잡는 배경이 된다.

독과점의 빛과 그림자

LG기업사를 보면, 럭키그룹을 성장시킨 제품에는 독과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약·합성세제·TV·세탁기·냉장고·선풍기·전화기 등등 오늘날 LG를 있게 한 과거의 이 같은 독과점 품목들은 LG의 빛과 그림자를 이루었다.

▲1970년대 럭키치약 광고 한 장면 <사진=한국광고협회 광고정보센터>

당연히 남보다 먼저 뛰어 들어 국내외 시장을 선점하고 기술 혁신을 꾀한 측면은 밝은 면의 총체를 이룬다. 에컨대 치약은 독과점적 성격을 띠다가 경쟁기업이 나타나자 곧바로 품질개선과 가격우위를 점하며 경쟁사를 물리쳤고, 그 결과 고객 이익으로 돌린 면이 없지 않다. 

또 미국 PX에서 흘러나오는 물건과 일대 한판을 벌이는 과감한 도전과 투자를 통해 ‘국산’의 입지를 끊임없이 넓혀 왔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조그마한 지식도 없던 척박한 경영환경에서 근대적 기업을 만든 것은 지금으로 봐도 대단하다는 평가다. 민족자본이 형성되기도 전에 일제의 의해 짓밟힌 국내 산업 여건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지니고 있던 토지자본을 상업자본·유통자본으로 전환시킨 것은 시대를 성큼 앞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전기전자·석유화학 등 근대적 기업군을 형성하며 막대한 고용 창출과 자체 기술을 확보한 공로는 불확실성을 딛고 한발 한발 전진해 온 글로벌 기업 LG의 창의력의 결과로 평가된다.

반면 소비자의 희생 위에서 대기업이 부를 쌓았다는 비판은 좀처럼 피하기 어렵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마음껏 누린 결과 부의 확장 속도나 범위가 광폭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경쟁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품 가격을 과도하게 높여 받기도 했고, 독점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 그 같은 행태가 지속되었을 거라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대한민국 재벌 기업은 정경유착의 수혜자라는 비판이 늘 제기된다. 그럼에도 그룹으로 커가는 중에 겪었던 성장통이나 규모의 경제도 크게 작용하고, 그룹을 유지하는데 든 유명세 등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LG와 GS는 이제 과거와는 여러 면에서 현격히 다른 그룹으로 분리됐다. 나라의 국격을 높이는데 기업의 역할이 크다는 것은 글로벌화가 가속화될수록 더 피부로 느껴진다. 플라스틱 빗과 세숫대야, 치약 따위나 만들던 회사가 글로벌을 논한다는 것은 어쩐지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 그 시절엔 가장 최첨단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LG가 처음부터 중후 장대한 사업군을 거느리고 글로벌 시장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한 것은 아니다.

구씨·허씨 동업이 고객을 향한 것이든 자신의 부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든, 대한민국 기업의 상생 모델을 찾는 데에는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창업자 구인회는 사라졌으나 그가 지향한 바는 오늘날 LG와 GS 내부에 살아 있다. 그것이 독점이익과 기업가 정신 사이에서 완강히 버티고 있는 구인회 정신의 핵심일 테고,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두 개의 상반된 입장을 조율해 내는 구인회의 치열한 기업가 정신이다.

물론 이런 전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업은 오로지 사람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사업을 통해 없던 시장을 만들어 내고 시대의 흐름을 이끈 초발혁신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이뤄 낸 매우 특별한 혁신의 본질을 꿰뚫고 지배한 사람들 말이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구씨이야기·허씨이야기, 전경일 지음>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