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라고 믿었는데… 여자라니…”
“내 남자라고 믿었는데… 여자라니…”
  • 정은혜 
  • 입력 2006-04-04 09:00
  • 승인 2006.04.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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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대 여성이 ‘남장’을 하고 여성에게 접근해 결혼을 미끼로 금품을 가로채는 ‘황당한’ 사기극을 벌이다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어 화제다. 서울 서부지법 형사6단독 권창영 판사는 지난 28일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강모(여·20)씨와 결혼할 것처럼 속이고 돈을 뜯어낸 혐의(사기)로 손모(여·26)씨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황당한 것은 강씨가 손씨에게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갔다는 점이다. 손씨와 수개월간 사귀었던 그녀는 손씨가 당연히 남자였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끝내 눈물을 보인 강씨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았다.

9개월여 간 교제하며 동거,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지만 자신이 아는 ‘진실’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푸념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웃지 못할 사건은 무직이었던 손씨가 2002년 2월 빚이 1,000만원에 이른 가운데 신용카드 ‘돌려막기’조차 어려워지자 ‘남장’을 결심하면서 시작됐다. 손씨는 곧바로 머리를 짧게 깎고 양복을 차려입은 뒤 서울시내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다. 키 168cm, 몸무게 68kg으로 여성으로선 비교적 몸집이 큰 편인데다가 목소리까지 걸걸해 누구도 그가 ‘남자’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손씨는 웨이터 일을 하다 우연히 강씨를 만나게 된다. 대학 새내기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한편 돈 씀씀이가 헤펐던 강씨를 보고 손씨는 ‘먹잇감을 발견이라도 한 듯’ 적극 애정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성임을 숨긴 채 손씨는 “나는 26세의 건장한 미혼남”이라며 ‘이도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가명이었다. 강씨 역시 ‘놀기 잘하고 잘생긴 오빠’ 손씨가 싫지 않았다. 아직 철없는 강씨에게 손씨는 그야말로 ‘우상’이었던 셈. 이렇게 둘은 1개월간의 연애 끝에 그해 5월부터 동거를 하기에 이른다.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져 둘 사이엔 자연스레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

나이트서 만나 접근

그러자 손씨는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대로 돈을 요구했던 것. “결혼을 하려면 지갑과 반지가 필요하다. 우선 너의 신용카드를 이용해 구입하고 이달 월급을 받으면 돈을 주겠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강씨로부터 100여만원 상당의 지갑과 반지를 선물로 받아냈다. 손씨는 “사람을 때려 합의금을 줘야 한다”며 ‘급전’ 1,0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게다가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며 신용카드 대금 2,300만원을 대신 갚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돈맛을 들인 손씨는 더욱 대담해졌다. 그후로도 손씨는 강씨에게 ‘터무니없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돈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손씨가 강씨와 9개월여 동안 교제하며 뜯어낸 돈은 무려 3,850여만원. 사정이 이런데도 손씨의 사실상 약혼녀였던 강씨는 손씨의 정체를 몰랐다고 한다. 성별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

어떻게 손씨는 수개월간 ‘자신’의 성별을 숨기고 남자 행세를 할 수 있었을까가 의문이다. 과연 강씨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도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에 따르면 손씨와 강씨의 동거생활은 더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실제로 동네 주민들은 이들이 동거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부로 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강씨를 두고 “결혼도 안한 처녀가 살림도 잘하고 참 참하다”, 손씨에 대해선 “젊은 남자가 여자 몸 소중히 다룰 줄도 알고, 강씨가 남자 하나 잘 골랐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조서 및 당시 강씨의 진술서에 따르면 동거생활 중 손씨는 수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손씨는 유난히 옷 벗는 것을 싫어해 집안에서도 옷을 다 갖춰 입고 있었다는 것. 또한 공중목욕탕도 가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손씨는 “결혼하기 전까지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 “너의 순결을 지켜주고 싶다”는 식의 ‘든든한’ 말로 오히려 자신을 신뢰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순결 지켜주겠다” 성관계 회피


하지만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는 법. 2002년 중순께 강씨는 우연히 손씨의 친척을 만나 손씨가 여자라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된다. 당황한 강씨는 이런 사실에 대해 자초지종을 손씨에게 추궁했다. 그러나 손씨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뚝 잡아뗐다. 강씨는 어떻게 된 까닭인지 알아보려고 손씨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등본에 손모씨라는 ‘낯선 여자’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던 것. 이때까지만 해도 강씨는 그의 애인 이름을 ‘이도성’이라고 알고 있던 터였다. 그제서야 강씨는 손씨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 ‘혼전순결’을 지켜주겠다는 믿음직스러운 말 등도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강씨는 이미 손씨에게 4천여 만원을 쏟아부은 뒤였다.

진술서에 따르면 강씨는 “그 사람이 나를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남자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해 경찰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당시 경찰 관계자는 “아무리 손씨에게 빠졌다고는 하지만 강씨는 무조건적으로 그의 말만 믿고 돈을 퍼다 줬다”면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한번만 확인해 봤더라도 이런 황당한 사기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이어 이 관계자는 “특히 손씨는 자신의 성 실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강씨와 단 한번의 성관계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안에서 속살도 드러내지 않았다”며 “강씨가 이점만 의심했더라도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평범한 20대 여성을 자신의 ‘성’까지 속여 가며 파탄에 이르게 한 것일까.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손씨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나 변변한 직업이 없어 생활고를 겪었다. 일순간 카드빚을 막고자 시작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의외인 것은 이런 손씨에게 전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 그렇다면 ‘초보 사기꾼’인 손씨는 이 같은 ‘제법 그럴듯한’ 사기극을 과연 어떻게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었을까. 재판은 종결됐지만 이 사건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미스터리로 남을 공산이 크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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