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돈을 갖고 튀어라>는 일정한 직업 없이 친구나 친지의 동원 예비군에 대신 나가주고 용돈 받아서 생활하는 백수건달 천달수(박중훈)의 휴면계좌에 1,000억원이 들어온다. 구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최 변호사는 전직 최고 권력자의 가명계좌 1,000억원을 실명 전환하기 위해 천달수의 휴면 계좌를 이용한 것. 영화는 천달수가 그 돈을 찾아 도망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영화와 비슷한 사례가 최근 발생했다. 지난 6월29일 서울 명동 사채업자 이모(45)씨가 언론사에 괴자금 1조원에 대해 제보해 왔다.
천억원만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달라
제보자 이씨가 현금 1조원이 들어 있는 통장 사본을 처음 보여 줬다. 통장은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에서 발급됐고 발급 시기는 2004년 6월 2일이었다. 통장 계좌번호는 ‘010-38-70283-8’이었다. 이 통장은 발급 당시에는 예금 잔고가 없었으나, 2004년 7월 20일 1조원이 입금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는 것. 예금 종류는 저축예금이며, 통장 명의는 나모씨로 기재돼 있었다.
이씨가 통장사본을 입수하게 된 동기는 지난 2005년 10월에 나씨의 부탁을 들은 박모씨가 찾아왔고 박씨가 통장 사본을 보여주면서 “이 통장에 예금돼 있는 1조원을 찾아 그중 10%인 천억원만 나씨에게 주고 나머지는 국가에 헌납을 하든지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씨는 비공식적으로 외환은행에 1조원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정보기관 간부에게 확인 요청을 했고 며칠 뒤 연락이 왔다. 그 간부는 “돈이 은행에 들어 있는 것은 맞지만, 쉽게 인출할 수 없는 돈이기 때문에 인출시도를 중단하고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한다. 그 간부는 명확한 설명도 없이 그냥 그 일에서 손을 떼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전했다. 금융감독 당국이 1조의 거액이 입금되자 즉각 이 계좌에 대한 감시를 시작했고 정보기관과 이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3공화국 때 조성된 자금?
나씨의 통장에 든 돈의 출처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명동사채 시장의 일각에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통치 자금이라는 설도 나돌았다. 그렇지만 사실여부를 확인하기엔 쉽지 않았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3공 통치자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3공 때 만들어진 자금이 맞다”고 전했다. 그는 “1조원이 함께 특정 장소에 보관돼 온 것이 아니다. 200여개 계좌에 분산보관돼 온 자금을 한 곳으로 모아 나씨의 계좌에 입금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 자금이 조성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며 자금이 조금씩 모아질 때마다 은행계좌에 입금된 것이 아니라 기업운용자금으로 빌려 주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국내 중소 기업들을 대상으로 사채형식으로 관리해 오다 1979년 3공화국이 갑자기 문을 닫게 되자 이 자금이 공중에 붕 뜨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이미 올해 초 엄청난 돈이 입금돼 있는 통장을 들고 다니며 현금화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주요 정보기관을 동원해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했고 나씨 명의의 통장 사본을 비롯한 몇 가지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질적 자금관리자 따로 있었으나 사망
나씨가 직접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지 못하고 사채시장을 통해 현금화하려 한 이유가 있었다. 통장은 나씨 명의로 개설됐으나 계좌의 원장에는 나씨 이외에 다른 한 명이 더 있기 때문이었다. 나씨 명의를 빌린 실질적인 자금 관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씨는 실질적 자금관리자가 죽고 나니 욕심이 생겨 인출을 시도했다. 이 사실을 안 정보기관이 돈을 인출할 수 없도록 한국은행에 통보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괴자금에 대해선 관계기관뿐만 아니라 청와대 측도 보고 받아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사정기관의 관계자는 1조원의 괴자금에 대해 ‘사실’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확인해 줄 수 없는 성격의 자금이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 너무 깊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전했다. 외환은행측은 “나씨 명의의 계좌가 존재하지만 잔고는 없는 상태”라며 “누군가 1조원이 입금돼 있는 것처럼 통장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나씨, 6개월간 행방이 묘연
괴자금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나씨는 6개월째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씨의 장남(26)은 “오래 전에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렵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어렵게 살고 있겠냐”며 “아버지가 6개월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고 연락도 잘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실여부와 관계없이 1조원의 괴자금은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만약 1조원의 괴자금이 3공 시절의 통치자금이라면 국고에 환수되어야 할 것이다. 1조원 괴자금이 보도된 이후 은행마다 휴면계좌 속에 거액의 괴자금이 들어있지 않나 하고 찾는 고객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영화<돈을 갖고 튀어라>의 주인공처럼, 로또 당첨자처럼 일확천금의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번 1조원 괴자금 파문은 한 동안 뇌리에서 사라졌던 구권 화폐, 휴면계좌 사건이 또 다시 세인들의 머릿속에 생각나게 한다.
양세훈 twonew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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