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군산지역에서 한 유명한 역술인이 수십 명 손님들의 뭉칫돈을 챙겨 잠적한 사건이 발생, 파문이 일고 있다. ‘보살’이라는 경칭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던 이 역술인은 자신의 명성을 이용, 손님들을 상대로 사채와 계모임 등을 주도하다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여자신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피해자들은 이 역술인을 A씨라는 이름으로 고소, 검·경에 조속한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조사결과 A씨는 유령인물로 판명됐다. 그동안 그가 밝혀왔던 이름, 거주지, 가족사 등은 모두 ‘가짜’였던 셈이다. 현재까지 역술인을 고소한 피해자는 20여명. 피해금액은 무려 30여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 역술인을 A씨라는 가명으로 고소해 집계에서 누락됐거나, 가정파탄 등을 우려해 소장제출에 고민하는 피해자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실제 피해 규모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피해자들은 잠적한 역술인이 최모(57)씨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진 최씨의 거주지는 물론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손님들에게 ‘신적인’ 존재
피해자들에 따르면, 18년 동안 군산에서 철학관을 운영해온 최씨는 ‘내로라’하는 명성을 얻고 있는 역술인. 실제로 최씨의 점괘는 신통하게 들어맞는다고 한다. 과거사는 물론, 미래의 예견 또한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고. 때문에 최씨의 철학관은 입소문을 타고 나날이 번성해 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또 예약은 필수고, 예약하지 않고 올 경우 1~2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최씨는 자신을 “Y대 총장의 처제”라고 소개, 자신을 과장하고 포장했다. 심지어 유명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여러 월간지에 실린 선행 기사거리도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사회사업가로도 자신을 소개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의 이러한 사기근성은 그러나 ‘독’이 아닌, ‘약’이 되었다. 손님들은 사회적으로 위신이 있는 최씨를 떠받들고 신뢰했다. 그가 ‘보살’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주로 ‘사회적 약자’ 노려
최씨의 범행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부, 미망인, 독거노인 등 사회적으로 다소 ‘약한’ 자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실제로 피해자들 중에는 사별한 40대 여성, 유흥업소 직원, 혼자 사는 70대 할머니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년 전 남편과 사별, 현재 노점상을 하고 있다는 김모(46)씨는 곗돈 수천만 원을 잃은 사례. 김씨는 “홀몸으로 장애아들을 키우며 어렵사리 모은 돈을 몽땅 날렸다”며 대성통곡했다. 특히 그는 “죽기 살기로 모아온 6,000만원에다 친언니에게 꾼 돈 4,000만원까지 포함돼 있다”며 “언니는 벌써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40대 중반의 유흥업소 직원 박모씨도 “고생고생해서 술집에서 힘들게 모은 돈인데 송두리째 털렸다”며 망연자실했다. 70대 할머니는 집을 팔아 6,000만원을 전부 건네 빈털터리가 됐다며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딸을 시집보내겠다며 모아온 3,000만원을 잃은 50대 주부 신모씨 등도 넋을 놓았다.
‘역술인’이라는 직업, 이미지가 한몫
무려 십수 명이 감쪽같이 속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범행수법은 최씨의 직업과 그동안 쌓아 놓은 이미지 덕분에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상대는 99.9% 넘어왔다는 게 피해자들의 말이다. 게다가 최씨의 주변에는 유명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고, 최씨 또한 ‘수십억대 부자’인 것으로 소문이 나 있던 터. 그런 그가 감히 사기를 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교묘히 이용했던 최씨는 돈 관련 점괘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불려 주겠다’고 속여 목돈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당신(손님)만 특별히 도와 주는거야”라는 말로 그 손님과 ‘둘만의 비밀’인양 행동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자신에게 돈을 받으러 온 곗군들에 대해 마치 자신의 도움을 받거나 좋지 못한 사람들로 말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평소 철학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저 점을 보러 오거나 돈을 빌리려고 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 같은 입장의 피해자였다”며 아연실색했다. 또 “천기누설 등을 운운하기에 서로 모른 척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채무관계를 숨기려고 속였던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남편이 알까 두려워 혼자 ‘속앓이’
최씨와 인연을 맺은 지 무려 10년이나 됐다는 40대 주부 이모씨는 요즘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사 갈 비용을 비롯, 전 재산을 몽땅 털렸기 때문이다.
이씨에 따르면, 그는 1년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져 이사를 결심했다. 특별한 종교가 없어 고민에 빠지거나 어떤 결단을 내릴 때마다 최씨를 찾는다는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씨의 철학관을 찾았다고 한다.
이씨는 “최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제적으로 힘든 나에게 ‘돈을 끌어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해 최대한 불려 주겠다’고 했다”며 “최씨가 워낙 부자인데다 ‘최고의 역술인’이라는 평까지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라 전혀 의심치 않고 전 재산을 내줬다”고 전했다. 이렇게 해서 이씨가 최씨에게 건넨 돈은 지난 4월부터 7월 중순까지 모두 8회에 걸쳐 1억 7,000만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의 남편 김모씨는 아내의 이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질타했다. 이혼까지 생각했다는 김씨는 하지만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심정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 최씨가 ‘비정한’ 사람”이라면서 “하루 빨리 그를 검거해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김씨는 “우리 부부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다”며 같은 동네 주민 유모씨를 일례로 들었다. 이씨는 “유씨는 시내에서 수년간 채소장사를 해오며 마련한 돈 1억 6,000만원을 고스란히 뜯겼다”며 “그들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들 사례와 달리, 공직자인 남편을 의식해 고소하지 않은 피해자들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30대 후반의 한 주부는 3,000만원이 물린 상태지만 공직자인 남편을 의식해 고소여부를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주부 2명도 3억여 원씩 건넸지만 남편이 알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이 최근 구성한 대책협의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접수된 사례는 20여건이다. 피해금액은 30여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하지만 피해상황을 계속 접수받고 있는데다 외지인들까지 포함하면 앞으로 피해자 수와 피해 금액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피해자들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달 초 철학관 집을 매매했으며, 26일에는 집 전화, 핸드폰을 해지한 후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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