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①]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LG ①]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2-12-04 10:12
  • 승인 2012.12.04 10:12
  • 호수 970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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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전자산업의 골드스타, ‘한국경제의 뼈대’ 세우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네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특유의 성장모델을 구축한 글로벌 기업 LG다.

▲연암 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

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는 1907년에 경남 진양군에서 3·4백석 지기의 중농인 구제서(具再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인회는 1926년 서울 중앙보고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구인회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일본인이 ‘눈깔사탕’ 장사를 통해 점차 사업품목을 확대하는 등 동네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29년에 협동조합 이사장이 된 구인회는 부산·마산·진주 등지에서 석유·잡화 등을 구입해 마을사람들에게 공급하면서 사업원리를 터득했다.

협동조합 경영을 통해 사업경험을 쌓은 구인회는 부친으로부터 2000원을 받아 1931년에 진주에서 아우 철회(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具仁會商店)이란 포목상을 개시했다. 철회 또한 1800원을 투자해 형제간에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운수사업도 함께 병행했다.

또한 구인회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특수를 예견하고 광목 2만 필을 사재기해 8만 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940년 6월에는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새롭게 어물 및 청과물을 취급했다. 이듬해인 1941년에는 둘째 아우인 정회(貞會)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 경영시대를 맞이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朝鮮興業社)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부산에는 목탄을 주 연료로 하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았는데 일본 대마도에서 목탄을 수입해 판매할 목적으로 이 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회사 설립 후 구인회는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했지만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정회가 화장품메이커인 부산 흥아화학공업사(興亞化學工業社)의 김준환(金俊換)을 만났다. 당시 이 회사의 생산직 직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제공했다.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이 정보를 통해 구인회 형제는 흥아공업에서 생산한 여성용 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이 무렵에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와 셋째 아우인 태회(泰會)도 경영에 참여했다.

구인회는 흥아공업에서 물건을 받아 서울에서 판매했다. 당시 흥아공업이 부산지역 판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심했다.

구인회는 화장품판매를 통해 확보한 자금과 고향의 논밭을 처분해 마련한 3000만 환으로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설립했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맡았으며 허준구는 판매를 담당했다. 그리고 김준환을 스카우트해 생산을 전담케 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됐다. 감화조를 비롯해 감화한 원료를 처리하는 방치선반과 압착여과기·향료혼합조 등을 설치했다. 생산초기 직공은 20여명 내외에 불과했다.

▲락희화학공업사 최초 사옥인 공장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는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다.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 개 내외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구인회는 공급에 주력하기 보다는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화장품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慈暻)을 경영에 참여시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되면서 국내 화장품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제 화장품이 뛰어난 데다, 당시 국내 업체들은 선호도가 떨어지는 중국산 향료를 수입해 화장품을 제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50%정도 저렴한 일제 향료를 수입해 제조한 뒤 판매하는 등 품질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럭키’ 크림은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성형사업 개시

이 무렵 구인회는 플라스틱사업에도 진출했다. 쉽게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뚜껑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국산 화장품의 뚜껑 소재는 유리로 되어 있어 쉽게 파손되곤 했다. 이에 구인회는 대용품으로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개발은 주로 태회가 담당했다.

구인회는 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 환으로 1952년 9월에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크림뚜껑 등을 생산했는데, 소비자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구인회는 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 점차 품종을 넓히는 와중에서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성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락희화학은 1954년 5월에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해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확보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부대를 통해 유출된 콜게이트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까키치약이 있었으나 콜게이트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절대 다수 국민들은 소금으로 양치질하는 상황이었다.

‘럭키치약’ 판매가 시작되자 수요가 급증했다. 이는 1955년부터 치약을 군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는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기업 중 럭키화학이 4위에 랭크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을 특화해 1956년에는 PCV파이프를 생산했고, 반도상사로 개명해 무역업도 강화했다. 1957년부터는 비닐장판·폴리에텔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업체로 부상했다.

최정상의 기업집단 완성

락희화학이 국내최대의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직접적 계기는 부산에 금성사를 설립한 것이다.

1956년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커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했다”며 “이 무렵 일본 통산성의 백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백서에는 석유화학 또는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구 사장은 아직 국산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하면서 사업성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윤욱현을 중심으로 1958년 4월에 라디오·플라스틱 잡화·전기기기 부품·유라이트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 도입비로 8만5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의 라디오기술자인 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기술요원 확보를 위해 공고 및 공대졸업자들을 모집해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1959년에는 차관 및 은행융자 등 때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생산에 착수한 결과 그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라디오인 A-501을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산라디오에 대한 홍보부족과 외제라디오 때문에 금성사는 출발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도약계기가 초래했다.

1961년에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외제품 배격운동’을 정부차원에서 전개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홍보할 매체로 라디오를 선정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만 13만7000대를 파는 등 4억3100만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전화기·적산전력계 등도 생산하는 한편, 1964년 말부터는 동남아·중남미 등에 수출하는 등 급성장했다. 이때부터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다. LG그룹이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직 계열화 구축

금성사 설립을 전후해 락희화학은 제조업중심의 수직적다각화를 전개했다.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 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공장 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 부문의 ICA원조자금 34만 달러 등으로 충당했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인 만큼 비누를 만들면 자연히 글리세린이 생산되었다. 당시 우지(牛指)는 소맥·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 됐기 때문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愛敬油指)가 독점 공급한 탓에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서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비닐제품에 대한 국내수요가 증가하자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 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구인회는 비닐장판·스폰지·레저·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해 부산 연지공장의 비닐부문을 분리해 설립했다.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許晉九)가 50대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해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 환의 한국케이블공업도 설립했다. 5·16직후 정부가 부정축재기업인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이득으로 5대 기간산업을 건설해 국가에 헌납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종합 전기 공장을 설립해 헌납하기로 하고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유럽·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구인회에게 송배전선공장을 설립하도록 권고, 서독의 Fuhrmeister사와 송배전선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구인회는 이 회사와 295만 달러의 차관계약 체결을 통해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1966년에 이 공장은 금성사에 통합되었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되었다.

1968년 3월에는 미국 Continental Carbon Co.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 한국콘티넨탈카본(자본금 2700만 원)을 설립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다만 충주 비료공장의 연돌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카본블랙 생산 공장 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 관계에 있던 미국의 컨티넨탈 카본사가 합작을 제의해 설립한 것이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000여 평의 부지에 공장 건설을 착수해 1969년 9월에 연산 7500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했다.

한편, 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해 언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되었다가 1950년 8월에 국제신보로 개칭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되었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초대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했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반도상사·락희유지·락희비니루·한국미공·국제신보 등을 두어 기업 집단을 형성했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한국재벌사, 이한구 저>
<사진제공=LG그룹 홍보팀>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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