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내부갈등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 법조계 전체가 크게 술렁이고 있는 것. 정상명 검찰총장은 21일 이대법원장의 발언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어 파장을 증폭시켰다. 대법원은 이대법원장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이 빚은 오해라며 간접 사과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과 검찰·변호사 간 ‘정면충돌’ 위기는 일단 봉합됐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존재한다. 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 법조비리 수사를 둘러싼 법원과 검찰 사이의 다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검 중수부가 전국 검찰의 영장기각 사례를 취합하라고 지시, 양측 간 갈등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취임 1주년(9월 25일)을 앞두고 최근 일선 법원을 순시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직설적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검찰과 변호사들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기 때문이다.
일선법원 순시서 발단
이번 파문의 발단은 지난 1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대법원장의 발언은 이날 부산을 시작으로, 순천(12일), 광주(13일), 대구(18일), 대전(19일) 등 전국 지법·지원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터졌다. 이대법원장은 “법원이 재판 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검사의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대전), “검사들이 사무실에서, 밀실에서 비공개 진술을 받아놓은 조서를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놓느냐”(광주), “재판정에서 검사들은 수사기록만 던져놓고 유죄 입증을 위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대전)고 말했다.
이에 앞서 순천에서는 “왜 법조(法曹) 3륜(輪)이라고 말하느냐. 법원이 몸통이고, 검찰과 변호사는 바퀴다”라고, 광주에선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대개 상대방을 속이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표면상 수면아래 잠복
이에 대해 검찰은 대외용과 대내용, 두 가지로 입장을 정리했다. 대외용은 “대법원장의 발언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상투적인 입장만 표명했다. 하지만 정총장이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대내용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총장은 공식입장 발표와 별도로 지휘서신 형식으로 검찰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에는 이대법원장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기록을 던져라”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법으로 증거능력이 부여된 조서를 무시하라는 발언으로 들려 듣기 민망한 표현”이라고 대응했다. ‘밀실수사’에 대해서는 “영상녹화로 투명성이 담보된 검사실 조사를 밀실수사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검사가 법정에서 유죄 입증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 데 대해서는 “검찰 노력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총장은 “법조계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처신을 무겁고 신중하게 해달라”며 갈등 봉합에 나섰다.
이처럼 대외, 대내 반응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법원과 검찰에 덮칠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정총장이 유감을 표명함으로써 표면상 수면은 고요해 보이지만, 심해에서는 검사들의 불만이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대법원장 발언의 여파는 변호사 단체에서 더 강하게 일었다. 대법원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낸 것. 대한변협은 “사법부 수장으로서 문제 있는 발언이었다”며 강력한 대응책을 주문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도 “변호사의 지위를 법원의 보조기관으로 전락시켜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대법원장의 사퇴촉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검찰 “우발적 아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도 검찰과 변협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다. 대법원장의 사퇴요구까지 하고 나선 변협에 대해서는 ‘유감’ 성명을 내 반박하고 나선 반면, 검찰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사과의 뜻을 전한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표현 한마디를 꼬투리 잡아 사법부 수장을 상대로 사퇴를 요구할 정도라면 변협 회장은 이미 여러 번 사퇴해야 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로써 이대법원장 발언으로 촉발된 법원-검찰-변협의 ‘3각 분쟁’은 법원과 변협 간 분쟁으로 새 국면에 접어들 전망이다.
한편, 검찰이 법원에 맞대응하지 않고, 법원이 검찰에 사과의 뜻을 내비치는 등 관계가 순화되는 듯 보인다고 해서 이들 사이의 앙금까지 완전히 제거됐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대법원장의 이번 발언 파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면서 “그는 그동안 직설적 발언으로 여러 번 물의를 일으킨 바 있으며, 내면에 감춰진 갈등의 일부가 외부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영장 발부 놓고 불협화음도
실제로, 검찰과 법원의 갈등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영장실질심사 도입이나 법조비리수사과정에서 심각한 불협화음을 겪기도 했다. 검찰이 배임혐의를 받고 있는 판사출신 변호사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수차례 기각, 심각한 갈등을 빚었던 것. 이후 갈등은 외견상 봉합됐지만,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다는 게 검찰관계자의 설명이다.
사행성 게임기 비리 의혹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 수사 등 굵직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법원과 검찰이 영장을 놓고 미묘한 감정싸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찰은 최근 일선 검찰청에 영장기각 사례를 대검 중수부에 보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법원의 고의적인 검찰 수사 불협조에 대해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검사들의 조직적인 반발, 즉 검란(檢亂)마저도 예상되고 있다.
한편, 법조계의 갈등이 새 국면을 맞은 가운데, 이번 파문의 당사자인 이대법원장이 26일 서울고등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에 법조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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