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연루된 이른바 ‘일심회 사건’을 수사 중인 국가정보원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송찬엽)는 북한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장민호(미국명 마이클 장)씨 등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통해 내년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공안당국은 특히 북한 대외연락부가 장씨 등에게 “야당 유력 대선주자의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내린 단서를 잡고 구체적인 확인 작업에 돌입했다. 지령의 내용과 분량이 예상외로 많아 분석 작업이 완료될 경우 ‘매머드급’ 파장이 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장씨의 부인이 주한미군 고위간부의 비서 출신이라는 점이 추가로 밝혀진 대목도 눈길을 끈다. 나아가 장씨와 접촉한 정치권 유력 인사를 비롯, 그의 대학 선·후배까지 수사가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과연, 이번 사건이 정치권에 ‘매카시 열풍’을 불러올지, 아니면 역풍으로 바뀌어 ‘신공안정국’을 만든 세력이 ‘화’를 입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국가정보원이 입수한 일심회 보고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민주노동당을 ‘민회사’, 열린우리당은 ‘우회사’, 한나라당은 ‘나회사’로 각각 표기했다. 조직원 장민호씨와 손정목씨, 이진강씨 등이 직접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회사원으로 재직 중이라는 점 때문에 ‘회사’라는 이름을 쓰면 외부의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들은 북한 조선노동당을 ‘우리당’으로 불렀다. ‘우리당’은 열린우리당의 약칭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이밖에도 좌파세력은 ‘좌회사’, 통일전선체는 ‘통회사’ 등으로 지칭했다.
지령 문건은 ‘은어’로 작성
이쯤 되면, 10여년간 사실상 ‘고정간첩’으로 암약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장민호씨를 통해 북한의 지령이 거미줄처럼 각계로 퍼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권에서 L, J, A의원 등이 장씨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이들과의 연관성 여부가 또 다른 관건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표를 제출하자, 일각에선 386세력의 압력설을 제기했다. 간첩 사건의 파문이 확대일로를 걷게 된 원인 중 하나다.
이와 관련, 국정원 한 관계자는 “10여년 가까이 이번 사건을 추적하고 준비해 온 것으로 안다”면서 “내부에선 시기적으로 지금이 간첩 사건을 오픈할 적기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일부 언론에서 국정원장의 사퇴 이유와 관련,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에 대해 “국정원은 이번 사건의 배후에 대해 특정지은 바가 없다”고 지적했다. 참여정부에 포진해 있는 386세력과 국정원의 ‘신경전’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국정원 또 다른 관계자는 “장씨 등이 ‘묵비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이들의 변호인단이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공작금을 받았다면 고정간첩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간첩단 사건’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장민호씨는 과연 누구인가.
미국 시민권자인 장씨는 1981년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년 뒤 휴학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클 장이라는 이름으로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수사당국에 따르면 장민호씨는 미국에서 친북인사 김모씨에게 포섭된 뒤 89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모르스 통신교육 등을 받았다. 방북 직후 미군에 입대한 장민호씨는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파견된 뒤 서울 용산과 대전 미군기지에서 물류시스템을 담당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군 관련 정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대를 제대한 93년 그는 두 번째로 방북해 북한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충성서약을 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 있는 정보통신부 산하 민간 기관에 부장급으로 현지 채용되기도 했다. 정부 관련 기관에서 공인된 자격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활동이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99년 귀국한 그는 ‘벤처붐’을 타고 서울 강남에 3D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인 ‘나래디지털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며 한때 게임 전문 위성방송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경인방송 매각 과정에도 장씨가 개입한 흔적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받았다. 사업가로 변신했던 그는 2003년 자금난으로 인해 사업을 접어야 했다.
최근까지는 지상파 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업체인 K사 사장을 지냈다.
장씨는 IT업계에서 ‘마당발’로 활동했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포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부처 고위직에 근무하고 있는 장씨의 한 후배는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차례씩 장씨를 만난적이 있다”면서 “IT관련 사항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고, 내가 느끼기에 그저 진보적 의식을 가진 일반 사업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탐색→제안→포섭’ 3단계
그는 또, “추측컨대, 일심회는 고등학교 선·후배들이 장난삼아 만든 모임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장씨가 89~99년 최소한 세 차례 이상 방북해 간첩교육을 받고 미군 복무 기간을 포함해 10여 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장씨는 특히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일심회 조직원을 물색, 지하조직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대상자를 찾는 데는 ‘탐색→제안→포섭’이라는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학연, 지연을 활용하는 한편, 사업상 관계자들을 이용해 접근한 뒤 반미(反美) 활동, 북한 문제에 대한 입장 등을 1~2년에 걸쳐 검증했다는 게 공안당국의 설명이다.
장씨가 북한으로부터 ‘조국통일상’을 받았다는 점은 고정간첩 혐의를 더욱 짙게 한다.
그는 ‘일심회’를 통해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초 수상했다는 게 국정원측의 설명이다. 국정원은 장씨의 집에서 압수한 휴대용 컴퓨터 저장장치(USB) 메모리와 e-메일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일부 주사파 출신이 현정권 실세”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간 장씨는 북한을 방문해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후 “지하당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받고 99년 귀국, 일심회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과 검찰은 일심회 조직원들이 개별적으로 각종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일심회 조직 확대를 시도한 정황을 포착, 이들과 접촉한 인사들을 추적하고 있다.
수사당국은 정당 관계자 K씨와 학생운동권 출신 시민단체 관계자 K씨 등에 주목하는 등 386운동권 출신 인사들에게 무게감을 두고 있다.
전(前) 반미청년회 핵심 강길모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7~89년 연대와 고대 출신 총학생회 간부 출신들은 대부분 내가 속한 조직에서 주체사상 교육을 받았다”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현 정권 실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386운동권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심화될 수 있는 발언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 베이징 아지트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곳은 북한 대외연락부가 남측인사들과의 접선용도로 관리해온 장소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은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체포된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40)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수사기록에 공작원 접촉 장소를 지목함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국내 인사를 접선하는데 활용한 비밀 아지트라고 국정원이 파악하고 있는 이곳은 중국 베이징의 ○○동에 위치한 ‘동욱화원’이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고정간첩이자 이 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장씨가 ‘일심회’라는 비밀조직의 조직원으로 포섭한 국내 인사들은 각각 다른 시점에 한 명씩 이곳을 찾아 북한 공작원들과 접촉했다.
장씨의 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현재 홈쇼핑 회사에 다니는 이진강씨는 2003년 4월에, 최 사무부총장은 작년 8월에, 이정훈 전 민노당 중앙위원은 올해 3월에 출국해 ‘동욱화원’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동욱화원에서 접촉했다는 북측 공작원은 북한 대외연락부 유기순 부부장과 김정용 과장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욱화원을 남한 인사들의 고정적인 접선 장소로 관리하고 있는 대외연락부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4개 대남 공작부서 중 하나로 1947년 조선노동당 5과로 창설돼 사회문화부 등으로 개명됐다가 확대 개편된 부서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장씨 등 관련자들은 공안당국의 ‘기획수사’라고 반발한 것과 관련, 김승규 국정원장이 “이번 사건은 간첩단 사건이 확실하다”고 언급한 데 이어 지난 10월 30일 공안당국 관계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공안당국이 그간 확보한 물증을 토대로 북측이 장씨를 통해 내린 지령의 실체를 상당히 포착했다는 방증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변호인단은 김승규 국정원장을 ‘피의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정치적으로 이미 장씨가 올해 초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보고한 한나라당 유력 대선주자 관련 동향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만큼 차기 대선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의 대비책 마련도 시급해 보인다.
시민단체를 반미투쟁에 끌어들이는 방안 등이 지령 내용에 포함됐고, 지난해 중국 선양에서 5개 사회·시민단체와 북한 공작원 접촉을 장민호씨가 주선한 부분에 대한 수사도 이뤄지고 있어 북측이 시민단체를 배후에서 조종해 반미시위 등을 주도했다는 세간의 ‘설’이 사실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구속기간 10일 연장키로 결정
하지만 장민호씨가 북측 지령을 받았더라도 그것이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북측에 유리한 정국으로 실현됐을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공안당국이 장민호씨 등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할 물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정치권이나 국민으로부터 ‘공안정국’을 조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고정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장민호씨 사건과 관련, “미국과 친미보수 세력의 날조·모략”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공안당국은 장씨 등 구속된 간첩혐의자에 대한 구속기한이 3일로 만료 이를 10일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김대현 dhkim@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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