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②]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SK그룹 ②]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2-11-27 10:21
  • 승인 2012.11.27 10:21
  • 호수 969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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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직물공장,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열정과 패기로 새 역사를 기록한 SK그룹이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대망의 수직계열화 이룩
‘SKMS·수펙스’ SK 미래 여는 혜안의 열쇠

SK그룹 창업주이자 형인 담연 최종건 회장이 타계한 뒤, 최종현 회장은 최고경영자로서 고독한 길을 걸어가야 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은 신년사 형식을 빌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데 따른 사내의 의혹 어린 시선은 물론, 성공 가능성에 대한 임원들의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손길승(당시 이사·現 SK텔레콤 명예회장) 회장이 훗날 말했던 것처럼 수직계열화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최종현 회장의 최대 성공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976년 종합무역상사인 주식회사선경을 발족시킨 손 이사는 종합상사로서 성장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확장에 나섰다. 안정과 성장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 최종현 회장의 경영방침이었던 터라 내부적으로도 “선경은 굼벵이니, 거북이니”하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최종현 회장의 끈질긴 집념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바로 한국 정밀과학 기술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폴리에스테르 필름과 비디오테이프이다. 폴리에스테르 제조기술은 당시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만의 독점물이었으며, 어느 나라도 기술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연구개발비 400억 원을 투입해 3년여 각고 끝에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개발했고, 마침내 비디오테이프 개발에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던 중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유공(現 SK에너지)을 선경이 인수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SK그룹을 있게 한 가장 확실한 전환점이 바로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유공의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을 때, 당시 재계에서는 선경이 유공을 사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경쟁에 참여했던 대기업들 모두 자산 규모, 재계 영향력, 현금 동원력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현 회장은 1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온 산유국과의 인맥을 통한 정면 돌파로 유공 인수에 성공했다.

정부가 선경을 유공의 인수기업으로 선정한 사실을 밝혔을 땐 이미 최종현 회장이 알 사우디 은행과 1억 달러에 대한 장기차관 교섭을 끝낸 상태였다. 당시로서는 정부가 나서 차관을 얻으려고 해도 ‘광주사태’ 이후의 정국 불안으로 인한 리스크 때문에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가 없던 어려운 때였다. 그런 시기에 그가 차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은행의 대부분의 주주가 오랜 신의로 다져온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최종현 회장은 종합 에너지·종합 화학기업으로의 과감한 기업 변신을 단행했다. 선경기계주식회사·선경금속주식회사·선경머린주식회사·선경목재주식회사 등 중소기업형 계열기업 16개를 매각해 해산 정리하고, 1조5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1991년 6월 9개 신규 석유 화학 공장을 준공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대망의 수직계열화를 이룩해낸 것이다.

독자적인 경영기법 추구

국내에서 독자적인 경영기법을 체계화해 기업문화로 발전시킨 것은 SK그룹의 SKMS(SK Management System)와 수펙스(SUPEX-Super Exellent)추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현 회장이 생전 이룬 수많은 성과 중 가장 최고로 여겼던 것은 SKMS이다. SK가 SKMS를 처음 시행하던 1979년에는 주식회사선경·SKC 등 주력 사업으로 1조 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SKMS를 정립한 이듬해인 1980년 최대 숙원과제인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SKMS의 구체적 실천지침으로 수펙스를 제시한 뒤 본격적인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때문에 SK는 최근 적극적인 글로벌 시장 진출과 지주회사로의 투명한 지배구조 전환에도 여전히 SKMS라는 강한 기업문화가 바탕이 되고 있다. 이렇듯 SKMS 발전사는 SK정신의 형성이자 SK문화의 개척사이다.

SKMS가 탄생한 지 10년 만인 1989년, 최종현 회장은 그룹 연수원인 ‘아카데미’에 전 임직원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내가 1975년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계획을 처음 밝혔을 때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생각하니까 아이디어가 나오고 방법도 나왔습니다.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니 목표를 이룬 것입니다. 이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목표를 설정한 후 끊임없이 추구해서 이뤄 낸 석유사업 진출의 꿈을 이룬 최 회장은 자신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직접 경험한 것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함께 나누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수스펙 추구법’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 가능한 최상의 수준을 꾸준히 추구하는 SK만의 경영기법은 후대에서도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경영활동의 대부분을 각 계열사의 수스펙 추진상황을 보고 받는 데 할애했다. 전경련 회장직을 세 번 연임한 최 회장은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나 주말을 제외하고는 각 계열사 사장이 아닌 부장과 부원이 직접 부서의 추진계획과 진행상황을 보고토록 독려했다. 장시간 의견을 교환하는 릴레이 토론으로 ‘도시락 식사’는 다반사였다고 한다. ‘우수’나 ‘탁월’ 정도로는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했던 수직계열화와 유공 인수가 수펙스 추구의 자연스런 결과물이었던 것.

특히 세 번째 도약은 정보통신 사업에서 1990년대 들어오면서 정보통신분야가 미래의 핵심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국의 대다수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정보통신 사업권을 따내고자 했으나 SK는 남들이 생각지도 않던 10년 전부터 미래 성장동력의 하나로 정보통신사업 진출이라는 수펙스 목표를 수립하고 준비했다. 이동통신사업 진출 10년 전과 10년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수펙스 원칙에 의해 방향이 결정됐다.

1992년 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의 진출 허가와 기존 한국이동 통신의 민영화를 발표했다. SK는 그동안 준비해온 것을 바탕으로 마침내 1994년 한국이동통신의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부호분할 다중접속(CDMA) 시스템 개발이 한창이었고, SK는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를 이뤄냈다. 이것이 SK의 세 번째 도약의 시작이었다.

CDMA 세계 최초로 상용화

1994년 1월 중순 최종현 회장은 김창근 그룹 재무 담당 임원(現 SK케미칼 부회장)을 급히 찾았다. 불과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한국이동통신(現 SK텔레콤) 공개 입찰과 관련해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1년 4개월여 전인 1992년 8월 최종현 회장은 어렵게 따낸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는 대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터라 그룹 차원에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문제는 선경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주당 5만여 원에 불과하던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50일 이상 상한가를 기록하더니, 주당 30만 원 가까이 올랐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룹 내에서는 30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2000억 원 이상 더 주고 사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최종현 회장은 정보통신사업이 어떤 속도로 발전할지와 5년 뒤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면 얼마에 인수할 수 있을지를 따져 물었고, 김 부회장은 “정보통신사업은 빠르게 발전할 것이고 만약 5년 뒤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면 5000억 원은 더 줘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최종현 회장은 단호한 어조로 “사업을 충분히 준비해 왔고 미래가 밝으니 자금 2000억 원을 더 주는 것은 비싸게 사는 것이 아니다. 10년 이내 1~2조 원의 이익을 낼 것이기 때문에 비싸더라도 무조건 사라”고 지시했다. 인수가격만 4271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거래였다.

최종현 회장이 한국이동통신을 시세보다 비싸게 산 데는 특혜 시비를 없애겠다는 뜻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싸게 산만큼 반드시 정보통신사업에서 성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룹이 망할 수 있다는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동통신이 현재의 SK텔레콤으로 고속성장한 데는 그의 또 한 번의 파격적인 결정이 한몫을 했다. 그는 손 이사를 한국이동통신 대표이사 부회장 자리에 앉히는 등 소수를 제외하고 한국이동통신 현직 임원 전원을 유임시켰다. 가능한 기존 조직을 흔들지 말고 그대로 가져가고 선경의 문화가 한국이동통신에 자연스럽게 깃들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후 불안에 떨던 한국이동통신 직원들은 안정을 찾아갔고 이 같은 힘을 바탕으로 ‘단군 이래 가장 큰 소릴 칠 만한 기술’ 이라는 CDMA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켜 대박을 터뜨리게 됐다.

‘아름다운 유언’

1980년 유공을 인수할 당시 최종현 회장은 울산에 있는 정유공장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국에 있는 사업장을 일일생활권으로 돌아보기 위해 헬기를 구입할 정도였다. 전국의 사업장을 방문하는 것이 큰일이었던 최 회장은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인 경영은 가능해졌지만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전국 산하를 덮고 있는 묘지였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대부분 매장을 하는 것이 관례였던 우리나라 전국의 산하는 묘지로 넘쳐났다. 그때부터 최 회장은 국토의 효율성 측면에서 묘지에 대해 다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의 육신을 불에 태우는 것은 천하의 몹쓸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던 시절이라, 대외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내부에서만 장례문화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논의하는 수준에 그쳤다.

1990년대 초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한 최종현 회장은 대표적인 풍수지리 학자인 당시 서울대학교 최창조 교수를 만나 토론을 벌였다. 최 교수는 사후 출간된 최종현 회장 저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의 추천글 중에 “최 회장의 화장에 대한 확고부동한 태도에서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선산을 가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필부의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산소만 몇 개 있었다. 최 회장과 나는 ‘화장은 금기가 아니며 사회지도층인사부터 앞장선다면 우리나라 묘지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최종현 회장은 화장만이 묘지로 인한 국토의 비효율적 이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굳히게 됐다. 

그 뒤 최종현 회장은 “장묘문화 개선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내가 죽거든 시신은 화장하고 최고 수준의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는 유언을 수시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1998년 8월 26일 최종현 회장은 폐암이 악화되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평소의 유언대로 아들 최태원 회장은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최종현 회장의 화장 소식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고 다른 재벌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름다운 유언’은 최근 ‘아름다운 기부'로 완성됐다. 훌륭한 화장 시설을 만들어 기증하라는 유언에 따라 2010년 1월 12일 SK는 최신 장례문화센터를 준공하고 세종시에 기증했다. 대를 이은 약속도 값지지만 우리 장례문화에도 큰 울림이 됐다. 한 사람의 신념과 결단으로 시작된 자그마한 변화는 작게는 장례문화를 바꿨다. 크게는 국토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후손들에게는 그들로부터 빌려 온 자연을 그대로 물려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 KFI 미디어>
<사진제공=SK그룹 홍보실>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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