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80대 노교수가 성폭행범의 누명을 썼다 결국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K 대학에서 40년 넘게 재직한 뒤 지난해 말 퇴임한 명예교수 S(80)씨가 그 장본인. S교수는 자신과 한때 은밀한 사이였던 한 여성의 ‘빗나간 사랑’으로 인해 성폭행 등 혐의로 직위 해제됐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거짓증거를 대는 여성의 진술만으로 하마터면 구속될 뻔 했던 S교수는 대검찰청의 증거자료 정밀감식 과정에서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간 S교수에게 쏠렸던 수많은 오해의 시선들은 거두어지겠지만, 직위해제에 따른 명예실추, 정신적인 피해 등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할까. 한 여성의 치밀했지만, 2% 부족했던 자작극을 따라가 봤다.
지난 2006년 9월 중순께.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한 30대 여성이 찾아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K대 S교수가 교수회관 연구실에서 자신을 성폭행을 한 것도 모자라 이에 저항하다 폭행까지 당했다며 검찰에 고소한 것.
이 여성은 ‘신 내림’을 받은 무속인 권모(38)씨. 권씨는 당시 상황이 담긴 녹취록과 상해진단서 등 명백한 증거가 있다며 S교수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절친한 무속인 소개로 인연
검찰에 따르면 권씨와 S교수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년간 친하게 지내온 동료이자, 세간에 신통하다고 소문난 무속인 A씨의 소개로 인연이 된 것. 당시 무속을 연구했던 S교수는 이 분야의 일인자로 통했다.
권씨는 이런 S교수에게 자신의 진로를 상담 받으며 친분을 유지해 갔다. 심지어 꽃을 선물하면서 몇 차례 개인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권씨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자상하고 따뜻한,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S교수에게 권씨는 남다른 감정을 가졌다. S교수 역시 권씨
가 싫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갖고 1년 6개월여 동안 진지하게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지난해 초부터 S교수는 점차 권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권씨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자신을 피하는 S교수에게 심한 모멸과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안 만나주자 파렴치범으로 몰아
감정의 상처를 받은 권씨는 ‘어처구니없는’ 범행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하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자, 일단 권씨는 S교수의 연구실부터 찾았다.
S교수는 권씨에게 “연구할 것이 있으니 나가달라”고 요구했지만, 권씨는 30분여 간 연구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고, 참다못한 S교수가 권씨를 연구실 밖으로 밀어냈다. 이 때 권씨는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쳤다.
안 그래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던 권씨는 당시 상황을 몰래 녹음하고 있던 터. 권씨는 ‘잘 걸렸다. 한번 당해보라’는 심보로 이때부터 자작극을 꾸미기 시작했다.
권씨는 먼저 S교수의 정액이 묻은 자신의 옷을 성폭행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물론 이 옷은 두 사람이 과거 좋은 관계로 지낼 때 성관계를 맺었던 흔적이었다.
권씨는 성폭행 당시 상황이 생생히 녹취된 녹음테이프도 제출했다. 이 녹음테이프는 겉보기엔 권씨가 성폭행에 저항하는 상황이 담겨 있는 등 S교수의 성폭행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권씨의 증거자료를 분석한 결과 검찰은 당연히 S교수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S교수를 사법처리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정밀한 감식을 위해 대검찰청에 녹음테이프에 대한 감식을 요청했다.
대검찰청 조사서 누명 벗어
그러나 감식 결과 녹음테이프 내용은 ‘짜깁기’인 것으로 드러났다. 권씨는 치밀하게 편집해 그동안 S교수와 함께 있었던 상황을 교묘히 짜 맞췄던 것이다.
이에 검찰은 직접 권씨의 집을 압수수색해 테이프 원본을 확보해 확인했다. 권씨가 고의적으로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기에는 S교수가 성폭행을 시도했던 정황은 전혀 없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형사8부(차동언 부장검사)는 “권씨의 옷에서 검출된 정액도 사건 당일이 아닌 한 달 전 쯤 묻은 것이었고, 녹취록도 애초에 고소를 계획하고 특정반응을 유도, 그동안 녹음테이프를 짜 맞춰 제출된 거짓자료였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범인’인 S교수는 마침내 ‘성폭행범’이라는 누명을 씻게 됐다. 검찰은 S교수를 무혐의 처리하고, 권씨를 무고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관계자는 “한 여성의 빗나간 사랑이 증오로 변해 무고한 시민이 옥살이 할 뻔 했다”며 “권씨는 정신질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돼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그동안 다양한 강간·간통 사건을 다뤄봤지만, 이번처럼 치밀하게 녹취록을 만들고 증거까지 준비했던 사건은 없었던 것 같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무혐의 처분에 K대 분위기는 ‘뒤숭숭’
K대 교수 성폭행 사건이 ‘한 여성의 증오가 부른 자작극’으로 결론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학 총여학생회가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S교수 처벌을 공개적으로 요구해 온 K대 총여학생회는 지난 2월20일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기소됐다는 언론 보도에는 사실이 왜곡, 삭제돼 있다”며 “무고 혐의 기소가 무고죄로 확정 판결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성폭력 사건을 함부로 공론화하면 자칫 피해자를 두 번 죽일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공개적인 기자회견 등을 통해 “성폭행 교수를 처벌하라”며 사건을 공론화해 온 총여학생회가 이제 와서 “성폭력 사건을 함부로 공론화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서자 이들의 대응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학교 측은 차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K대 한 관계자는 “당시 성폭력특별위에서 S교수에게 소명기회를 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어 ‘직위해제’ 처분을 내리게 됐다”고 해명하며 “현재 S교수의 복직 여부에 대해 논의가 이뤄지고 있으며, 문제가 없다면 언제든지 복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K대학 측은 S교수 성폭행 논란이 가열되자 지난 1월 30일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명예교수직에서 직위해제했다.
정은혜 kkeunnae@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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