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②]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현대’ ②]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2-11-13 10:24
  • 승인 2012.11.13 10:24
  • 호수 967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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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노력하는 자가 곧 인재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성장한 강한 의지의 그룹 ‘현대’이다.

1953년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전쟁의 포성도 멎어가고 있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한겨울에 푸른 초원을 만든 기적’으로 제기에 성공한 정주영은 미군의 공사에만 의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 정부의 발주 공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전시의 사회 혼란으로 인해 그저 경험을 쌓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윽고 8월이 되자 휴전 협정이 맺어진데 이어 정부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했다. 정주영의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건설’ 역시 서울로 올라와 새로이 간판을 내걸었다. 

현대건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7년 9월에 착공한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했을 때부터였다. 수주 전 업계에서의 현대건설은 공사 수주 때마다 무조건 덤벼들어 끝까지 용을 쓴 그런 성향의 회사 취급에 그쳤다. 그러나 막상 전쟁 때 폭파된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 받자 모두가 놀랐다.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는 착공한지 1년여 만에 준공한 비교적 단기 공사였음에도 총 계약 금액이 당시 최대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대동공업·조흥토건·삼부토건·극동건설·대림산업에 이어 현대건설도 이른바 ‘건설 5인조’ 또는 ‘6인조’ 등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면서 1000여 업체들 가운데 선두그룹에 서게 됐다.

휴전 협정과 함께 몇 년 동안 저조했던 미국 공사가 주한 미군 증강 정책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었다. 정주영은 미군 공사에 눈을 돌리는 한편, 건설 장비에도 주목했다. 전시 중의 복구공사와는 달리 미군 발주 공사는 엄격한 건설 장비 조항이 명기되어 있기도 했지만 대규모 건설업은 무엇보다 장비 확보가 필수라는 평소 경험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안에 중기 사무소를 차려 관리 책임을 매제 김영주에게 맡겼다. 구입한 장비와 부속품들을 수리·조립·개조시켰고, 아직 보유하지 못한 기계도 만들어 썼다. 다른 경쟁 업체들보다 한 발 앞섰던 기계화와 장비는 이 무렵 현대건설의 성장에 큰 몫을 해냈다.

그런 결과 당시 건국 이래 최대 공사였던 인천 제1도크 공사를 성공리에 준공하면서 1960년 마침내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건설업의 수주액에 놀라 다짜고짜 뛰어든 지 15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정상에 설 수 있다는 정주영만의 ‘정벌의 문법’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토 정벌은 산 넘어 또 산이었다. 건설 장비에서 한 발 앞서 나가자 이번에는 시멘트가 곧잘 말썽을 부리곤 했다. 사실 건설 공사에서 시멘트는 쌀이다. 그런데도 공사를 벌일 때마다 시멘트 공급이 원활하게 지원되지 않아 중간 중간에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고 차질을 빚곤 했다.

정주영은 생각했다. ‘시멘트 원료는 모두 다 국내에 있지 않은가. 강원도나 충청도가 거의 석회석 산이어서 좋은 석회석을 얼마든지 캘 수 있다. 거기다 철분이 든 원료 약간만 섞어 만들면 되는 건데 어려운 일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린 그는, 건설업계의 만성적 골칫거리인 시멘트 문제를 해결해서 시멘트로 인해 빚어지는 공사 차질을 없애기 위해 1957년 시멘트 공장 설립 계획에 착수했다. 바야흐로 현대의 또 다른 영토 확장에 칼을 빼어든 것이었다. 

또 다른 사업, 현대중공업

오늘날 현대그룹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계열사를 꼽는다면 현대의 첫 길을 열었던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 그리고 ‘현대중공업’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선박을 만드는 ‘현대중공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정주영의 꿈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는 자신이 쓴 회고록 ‘이 땅에서 태어나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소라는 ‘밥풀 한 알’이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씨앗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어쨌든 1960년대 전반에 이미 내 마음속에 조선소가 머지않은 미래의 꿈으로 들어앉아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청년 시절 현대 식구가 되어 오랫동안 현대 가족이었던 이춘림 회장을 어느 해인가 일본 도쿄에서 만나, 이틀에 걸쳐 요코하마 조선소 가와사키 조선소 고베 조선소 시찰을 했다. 이춘림의 기억에 의하면 그때가 1966년도였다고 한다. 조선소 시찰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내가 때가 되면 국내에 조선소를 만들어 큰일을 하겠다는 구상을 피력했다고 한다.

정주영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1966년 현대건설로 해외 건설 시장을 개척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소형차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목표는 선박을 만드는 중공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주변의 반대가 없을 리 만무했다. 경험이나 기술도 없는데다, 천문학적인 투자 자금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 모두가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주영은 조선 사업 역시 건설이나 자동차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초기 투자 자금을 해외에서 빌려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로 자리잡았다.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에 4300만 달러의 대출을 요청했다. 이 액수는 당시 현대그룹의 총 자산보다도 많은 거액이었다.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작은 배도만든 경험이 없는 회사에 무엇을 믿고 그 많은 자금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주영은 영국으로 눈을 돌렸다. 영국으로 건너가 선박 건조에 관한 기술 제휴를 얻어낸 후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장들을 찾아다녔다. 영국 은행장들은 선박의 수주 계약서부터 요구했다. 그들 역시 선박에 관한 기술도, 경험도, 자금력도 없는 조선소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변했다.

정주영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로 달려갔다. 그리스로 달려가 거북선이 그려진 한국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갯벌 사진을 꺼내놓고 세계적인 선박왕인 리바노스 회장과 담판을 벌였다.

“선박이라는 게 뭐겠습니까? 안에 엔진이 있고 바깥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6세기에 ‘거북선’이라고 하는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정주영은 그 자리에서 리바노스 회장으로부터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 받았다. 그리곤 곧장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자 이거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 받은 계약서 입니다.”

정주영이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 부총재를 만나 선박 수주 계약서를 내밀자 그는 매우 놀랍다는 듯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전공했기에 그 어렵다는 조선소를 굳이 건설하려고 하는 거요?”
정주영은 자신에게 던져진 뜻밖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태연하게 되물었다.

“부총재님, 제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이미 충분히 검토하신 줄 아는데요?”
“그렇소. 당신의 사업계획서는 매우 완벽했습니다.”
그러자 정주영이 다시 말했다.

“부총재께서 물으신 제 전공은 바로 그 사업계획서입니다. 어제 오는 길에 옥스퍼드대학교에 잠시 들러 그 사업계획서를 보여주었더니 당장 경제학 박사 학위를 주던걸요.”

그 순간 함께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의 재치에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결국 정주영은 영국과 스위스 은행으로부터 당초 액수보다도 많은 1억 달러의 자금을 빌리는데 성공했다. 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달랑 조선소가 들어설 갯벌 사진 한 장과 그야말로 파부침선의 결심만으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 받고 자금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끊임없는 정벌

1974년 현대중공업이 국내 최초로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 받아 한창 건조 작업을 할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선박의 건조 작업은 배의 기본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초대형 크레인으로 선체 위에 구조물을 올려놓은 다음, 용접공들이 매달려 용접을 해나가게 된다. 모든 작업자가 그러한 초대형 유조선을 만들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모두들 그 거대한 배를 완성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선소가 들어선 울산 지역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면서 선체 위의 구조물이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선박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구조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자체 무게만 수십 톤이나 나가는 쇳덩이인지라 자칫 선박에 부딪칠 경우 선체에 손상이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선체가 파손되기라도 하면 선박 건조 작업은 도루묵이 되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울산에 머물러 있던 정주영은 상황을 보고받자마자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 작업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잠시 구조물을 올려다보더니 다짜고짜 도크 쪽으로 걸어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현장 직원들 모두가 놀라서 막아보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정주영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체 위로 올라갔다.

비바람은 계속해서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선체의 브리지까지 올라간 그는 주변에 늘어져 있는 와이어로프로 흔들리는 쇳덩이를 고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번이나 발이 미끄러지면서도 끈질기게 시도를 반복했다.

그쯤 되자 그동안 두려운 나머지 망설이고만 있던 현장 작업자들이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도크로 달려 나가 선체의 브리지 위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쇳덩이를 고정시키는 작업에 일제히 달라붙었다.

하지만 선박 건조는 시작에 불과했다. 거대한 선체가 도크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서 있어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들었지만, 그 거대한 배가 과연 물에 뜰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던 것. 현대중공업 직원들은 내심 두렵고 긴장이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주영은 그런 기색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또다시 선두에 나섰다. 그는 건조가 끝난 초대형 유조선을 도크 안에서 옮기는 작업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여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호령소리에 현장 작업자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유는 없다. 나를 따르라!”

정주영이 현대그룹에 심어놓은 정신이다. 자신의 판단에 근거한 확신과 비전이 있었던 그는 직원들과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며 새로운 분야를 끊임없이 정벌해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이 바로 그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무한, 정주영 집념의 승부사, 정몽구 결단의 승부사>
<끝>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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