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현대’ 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2-11-07 09:45
  • 승인 2012.11.07 09:45
  • 호수 966
  • 4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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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쌀집으로 현대의 첫길을 열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성장한 강한 의지의 그룹 ‘현대’이다.

현대의 경우 유난히 위기가 많았다. 창업주 정주영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첫 분열을 겪은데 이어, 2세로서의 승계 과정에서 또 다시 분열에 휩싸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 내성을 길러냈다는 점은 분명 다른 그룹들과 차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실함이 일궈낸 기적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던 암울한 시기, 찢어지게 가난하고 답답한 고향 땅 강원도 통천은 젊은 정주영에게는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었다. 그는 모두 네 차례에 걸친 가출 시도 끝에 마침내 서울 생활에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아직은 어린 꿈에 부푼 1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끊임없이 동경했던 서울이었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공사장의 막노동, 품앗이 일꾼, 공장에서의 직공 등의 일을 전전한 끝에 2년여 만에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의 배달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쌀가게 배달원은 당시 그의 처지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2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늙은 주인으로부터 뜻밖에도 쌀가게를 물려받게 된다.

그가 쌀가게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때문이었다. 비록 배달원에 불과했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착실하게 배달 일을 하고, 매일같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쌀가게 앞을 깨끗이 청소했다. 게으르기 짝이 없던 난봉꾼 외아들 때문에 골치가 썩던 늙은 주인은 그런 정주영이 기특해 많이 아껴주었다.

더구나 쌀가게 배달원 생활 반년여 만에 돈은 많이 벌었어도 배운 거라곤 없어 회계 장부조차 쓸 줄 모르는 주인을 대신해 회계 장부 정리까지 맡아 할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창고를 말끔히 정리 정돈하여 쌀과 잡곡의 재고를 한눈에 쉽사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해놓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정성을 다해 일했다.

그러한 모습을 눈여겨보았던 늙은 주인은 외아들의 난봉에 의욕을 상실한 나머지 결국 복흥상회를 정주영에게 물려주게 된다. 정주영은 신당동의 길가에 사글세로 가게를 얻어서 서울에서 제일가는 쌀가게를 만든다는 포부로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의 나이 23살 이었다.

현대 시작을 알리다

23살 젊은 정주영은 자신의 첫 사업인 쌀가게 경일상회를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쌀가게를 물려받으면서 함께 확보한 단골 외에도 더 큰 고객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거래처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덕분에 배화여고와 서울여상 기숙사를 단골로 삼을 수 있었고, 쌀가게는 날로 번창해 나갔다.

그러나 쌀가게 경일상회를 시작한지 불과 2년여 만에 그만 비운이 닥치고야 말았다. 한 해 1937년 여름 만주의 노구교에서 총격전을 주고받은 사건이 사단이 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그 여파로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령을 내리고 미곡 통제와 함께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쌀가게는 일제히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는 언제까지나 전쟁이 그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이듬해가 되자 수중에 쥐고 있던 얼마 되지 않은 자금을 밑천삼아 다시금 사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엔진 기술을 가졌다는 이을학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둘은 이내 의기투합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했다.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모체이다.

하지만 첫 시작은 여의치가 않았다. 갑작스런 화재로 인해 사업장이 불타버리면서 정주영은 그만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정주영은 쌀가게를 운영할 때 알게 된 삼창정미소의 주인 오윤근을 삼고초려 한 끝에 3500원을 빌릴 수 있었다. 아무런 담보도 없이 오로지 신용만을 걸고서 빌린 돈이었다.

정주영은 그렇게 빌린 돈으로 빚을 갚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열었다.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한 무허가 수리 공장이긴 했으나 돈을 조금씩 벌기 시작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통치는 젊은 그를 또 한 번 곤경에 빠트렸다. 일본은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데 이어, 그 이듬해 5월에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정주영의 무허가 자동차 수리 공장 ‘아도서비스’ 또한 일진공작소에 강제 합병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운송업에 뛰어들어 광석을 운송하는 하청일을 시작했고 1945년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정주영은 일본으로부터 압수한 기업의 땅 일부를 미군정청에서 얻어내 서울 중구 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 현대자동차공업사가 ‘현대’라는 상호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미군 병기창의 하청만을 받아 일했으나 나중에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낡아빠진 엔진을 바꾸어 다는 작업까지도 청부받게 되었다. 해방 이후 갑자기 교통량이 늘면서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날로 번창해나갔다. 일감이 많아지면서 한두 명씩 늘어나던 종업원의 수도 1년여 만에 80명으로 늘어나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군부대에서 건설업자의 계약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곤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받는 수금액이 한 번에 고작 30~40만 원이었던 것에 비해 건설업자들은 무려 1000만 원에서 2000만 원씩을 받아가고 있었다. 젊은 정주영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땀 흘린 노력이 아닌 업종의 차이로 받는 돈의 대가가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결국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현대자동차공업사’ 공장 옆 건물에 오늘날 현대건설의 모태가 되는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더 달았다. 회사를 하나 더 창업한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돈암동의 모든 가족이 나서 현대토건사 사업을 확장하는데 아낌없는 노력을 다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주영과 그의 가족은 다시금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부산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전쟁 피난지 부산은 정주영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인한 건설 물량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태평양을 건너 물밀듯이 밀려드는 미군들의 숙소와 군수 물자 집하장, 군사 지원 사령부 등의 건설이 다급한 실정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고 그랬는지 마침 그의 첫째 동생인 정인영이 미군사령부 건설 담당 맥칼리스터 중위의 통역으로 배치됐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자신의 통역 정인영에게 건설업자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주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주영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정주영은 주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미군 병사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습니다.”

때마침 여름 방학을 맞아 휴교 중인 학교 교실을 소독한 뒤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천막을 쳐서 숙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기한은 고작 한 달. 잠자는 시간을 3시간으로 줄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러던 끝에 정주영은 결국 약속한 한 달 만에 미군 병사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뚝딱 만들어냈다.

정주영의 추진력에 크게 감명 받은 미군사령부 측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각국의 사절들이 참배할 부산의 UN군 전체 묘지를 푸른 초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겨울철에 말이요?”
통역을 맡은 정인영도, 나중에야 그러한 사실을 안 정주영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내게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주영을 보고 빙긋 웃기만 했다.

정주영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맥칼리스터 중위의 태평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고민에 빠졌다. 게다가 참배일이 고작 5일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주영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문득 어린 시절에 자신이 목격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 들판에서 볼 수 있었던 푸른 보리밭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트럭 30여 대를 부산 인근의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낙동강 근처 보리밭에서 한겨울인데도 파랗게 자란 보리 포기들을 떠서 UN군 묘지에 옮겨심기 시작했다.

한겨울에 너무도 황량해서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던 UN군 묘지가 푸른 보리밭의 초원으로 변해가자 맥칼리스터 중위는 물론 미군 사령부 관계자들은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굿 아이디어! 엑셀런트!’를 연발하며 앞으로 미군 사령부의 건설 공사는 언제든 정주영의 현대토건사(現 현대건설)에게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한겨울의 보리 잔디는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정주영만이 해낼 수 있는 ‘창조적인 영토 정벌’이었다.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무한, 정주영 집념의 승부사, 정몽구 결단의 승부사>
<다음호에 계속>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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