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 싫고 야도 싫다”…정당 정치 위기

‘진저리’, ‘혐오’, ‘환멸’, ‘불신’, ‘무능’, ‘타락’, ‘실망’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이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민심을 돌보길 기다리면서 인내하던 국민들이 한계에 부딪쳐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국민들이 진보-보수 2분법으로 재단하는 기성 정치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3년 간 공고히 다져져 있던 ‘박근혜 대세론’까지 허물며 광풍을 몰고 온 ‘안철수 태풍’으로 발현됐다. 새로운 정치를 갈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정치권의 물갈이를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대선과 총선의 투표율이 점진적으로 떨어져 왔고, 광범위한 무당층이 존재하고 있다. 기성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는 냉소가 퍼져 있는 것이다.
안풍, 사회 구조적 문제 드러난 것
‘안철수 태풍’의 핵심층이 바로 그간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던 기성정치에 무관심했던 부동층 혹은 무당파층이다. 특히 2030세대와 40대 화이트칼라, 여성이 핵심 지지 기반이다. 양당 정치구도 바깥에 있던 광범위한 부동층이 안철수라는 새 인물에 쏠린 셈인데, 이를 탈정치 현상의 재연이 아니라 현 정치 구도를 포함한 체제 위기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정치구도에 실망한 부동층이 실력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언제든 정치에 적극 참여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라며 “탈정치라고 기성 정치권이 훈계할 게 아니라, 정치권 자체가 변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는 일자리, 주택, 교육, 보육, 노후 등 일상을 지배하는 우리사회 시스템 전반이 고장 났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현 체제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도 “안철수 현상은 그 지지층이 안고 있는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에 따른 삶의 질 저하와 불안 등 사회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박원순 변호사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안철수 태풍’은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 한 마디로 50%의 지지를 끌어냈던 ‘안철수 태풍’은 안철수 개인적 인기 때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기성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표출이었으며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안철수 태풍’은 향후 전개될 정치일정에 따라 시기를 달리해가며 ‘박원순 태풍’으로, 혹은 ‘문재인 태풍’, ‘김두관 태풍’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안철수, 박원순, 다시 안철수 태풍’으로도 변형, 확장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기성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불신 커져
이와 관련,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기존 정치권에 대한 존재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러다 보니 기존 정치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며 “현재 안철수 신드롬이 불고 있지만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와 할 말을 하면 또 새로운 신드롬, 제2, 제3의 안철수 신드롬이 나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 같은 국민들의 분노는 뿌리 깊은 ‘정당정치’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과 보수시민단체 대표들의 ‘끝장토론’은 흔들리는 정당정치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임헌조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는 이 자리에서 “세간엔 홍준표 대표가 한나라당 마지막 대표가 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며 “정당으로서의 용도가 끝났다”고 지적했다.
이갑산 시민단체네트워크 상임대표는 “오늘 싸우러 왔다”며 포문을 연 뒤 “한나라당은 세 가지 죄를 지었다. 수도이전에 일부 찬성한 점, 무상급식을 막지 못한 점, 4년 전 집권했을 때 실용이란 이름으로 가치·정책을 버린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선을 구하려고 나선 노병의 심정으로 시민후보를 냈는데 (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퇴로) 비장하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한나라당이 보수의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고 보수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새로운 보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상황도 비슷하다. MB측근 비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상황인데다 MB노믹스 실패에 따른 반향을 야당이 얻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
특히, 제1야당인 민주당은 국민들로부터 대안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받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최근 정치 불신이 만연해 있고 제3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는 게 사실이나 제대로 역사를 바꿔 나가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박영선 민주당 후보 역시 “MB정권과 맞서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 속에 정당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정당정치는 곧 책임정치라고 생각한다”고 호소하지만 국민들은 시큰둥하다.
진보정당의 처지는 더욱 옹색하다. 사실 진보정당은 안 원장과 박 변호사가 표방한 ‘반한나라당-비민주당’의 원조격이지만 10·26 보궐선거 과정에서는 작은 존재감조차 찾기 힘들다.
오히려 민노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의 통합안이 잇따라 부결되면서 진보정당 내부에서 내홍양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진보나 보수의 이분법적 잣대로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질, 창의적 상상력, 공공성 등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커지는데, 현 정당은 권위는 권위대로 부리면서 약속 안 지키는 아버지 역할만 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2008년 촛불집회에서 젊은이들이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며 축제 같은 시위를 벌였는데, 이후 정치는 좌우 논쟁만 심해지면서 더욱 경색돼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 더욱 커졌다”고 진단했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 역시 최근 정당정치의 위기를 유발한 여야의 행태에 대해 “여당이 국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단순히 표를 쫓아가다보니 존재감이 없어지고 있고, 또 비전 제시도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국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이 야당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야당 역시 대안 없이 항상 반대만 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집권만 못했지 여당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선거는 점차 다가오는데 정치권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별다른 타개책이 보이지 않는다”며 “아마도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지리멸렬하고 무질서한 기존 정치의 모습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조기성 기자 kscho@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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