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진검승부, 그 끝은?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진검승부, 그 끝은?
  • 유제성 언론인 
  • 입력 2005-06-07 09:00
  • 승인 2005.06.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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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신문들의 영향력을 따질 때 조·중·동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10%나 많아도 20% 정도까지로 끌어내리려 한다.”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03년 3월 당시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을 담당하는 핵심적 위치에 있던 A씨가 일부 기자들과 사석에서 만나 참여정부 언론정책의 기본 방향을 밝히면서 했던 말이다. 그는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시켜야 하는 이유로 ‘여론의 왜곡’을 들었다.

언론사별로 여러가지 사례를 설명했지만 주 타깃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가 이회창 후보와 결탁해 노무현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정보를 어떻게 조작하고 여론을 어떤 식으로 비틀었는지 잘 알지 않느냐.”A씨의 이 말은 ‘노무현과 조선일보’가 벌이는 ‘제 3차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첫 총성이었다. 양측은 이미 1991년에 ‘제1차 전쟁’, 2001년에 ‘제 2차 전쟁’을 치르면서 구원(舊怨)을 쌓은 바 있다. 그리고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제3차 전쟁이 일어나 3년째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제1차 전쟁

지금부터 14년 전인 1991년 9월17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인물 프로필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당시 ‘초선 국회의원 노무현’은 1990년초 단행된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통합을 거부하고 이기택·이철·김정길씨 등과 함께 만든 ‘꼬마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신민당이 합친 통합민주당의 첫 대변인에 임명됐다. 보통 정당의 신임 당직자가 임명되면 약점은 감춰주고 장점을 부풀려 소개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노무현 대변인’에 대한 조선일보의 소개는 잔뜩 꼬여 있었다. 먼저 제목부터 ‘고졸 변호사-상당한 재산가’였다.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조선일보의 특성이 묻어 있다.다음은 프로필 요지. “과거 5공 청문회 당시 돋보이는 활동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던 고졸의 변호사 출신. (중략) 원내 진출 이후 노사분규 현장을 자주 찾아다니는 등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지적도.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 대변인은 발끈했다. 다음날 곧바로 각 언론사에 해명서를 돌렸다. 그 내용은 “요트를 취미생활로 탄 적은 있으나 척 당 가격이 200만~300만원짜리 소형 스포츠용이었고, 동호인클럽 회장은 지냈지만 부산요트협회장은 맡은 적이 없다. 변호사로서 가난뱅이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평으로서의 재력가는 아니다”였다.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해명서를 실어주기는 커녕, 자매지인 ‘주간조선’ 10월6일자를 통해 문제를 확대재생산한다. 제목은 ‘밀착취재 : 통합 야당 대변인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였고, 내용은 노무현 대변인의 해명서를 ‘허위’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기사 내용에 분개한 노무현 대변인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민주당 출입기자 등을 동원해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서울민사지방법원은 1992년 12월4일 1심에서 원고 노무현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조선일보는 압박과 회유를 병행했고, 노무현 대변인은 소송을 취하했다.이런 과정을 거친 1차 전쟁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한 가지 있다. 당시 주간조선에 노무현 대변인을 속칭 ‘조지는’ 기사를 썼던 기자는 나중에 월간조선 편집위원을 지낸 W씨였다. 얼마 전 그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서 모두 180만원의 촌지를 받은 혐의로 법원에 출석하는 불명예를 당한 뒤 월간조선으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참여정부 청와대 참모들은 속이 후련했을 법도 하다.

제2차 전쟁

‘정치인 노무현’과 조선일보 사이에는 1차 전쟁 이후 간간이 충돌이 있었지만 10년 동안은 비교적 휴전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양측이 다시 맞붙은 것은 2001년이다. 이번에는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노무현’이 선제공격을 했다. 그 해 1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을 언급한 후 국세청을 동원, 중앙 언론사 모두에 대해 강도높은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그렇잖아도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의 행태에 불신이 팽배해 있던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DJ의 언론개혁에 적극적인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노무현 장관은 DJ의 언론개혁 발언이 나온 직후인 같은 해 2월6일 해양수산부 출입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언론과의 전쟁 선포를 불사할 때가 됐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언론과의 전쟁 불사’ 발언은 실제로도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2차 전쟁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해 3월 개각으로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고 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한 이후에도 그의 ‘조선일보 때리기’는 이어진다.노 고문은 그 해 7월1일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의 기관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또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자격으로 조선일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그 중에서도 8월1일 민주당 수원 국정홍보대회에서의 조선일보 비판은 공개적인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노무현 고문은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를 가리켜 ‘친일 반민족 신문’, ‘민주세력을 탄압한 반민주적 신문’, ‘세무조사도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비리특권 신문’이라고 맹렬히 몰아세웠다.노무현 고문의 이런 몸을 사리지 않는 지원사격에 DJ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언론과 ‘나홀로 전쟁’을 벌이던 DJ 입장에선 노무현 고문의 적극적인 가세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을 것이다. DJ는 이때의 노무현 고문 연설 내용을 녹음 테이프로 들은 뒤 전국 각 지구당에 돌려 홍보자료로 이용하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때부터 차기 여권 대선후보에 대한 ‘김심(金心)’, 나아가 박지원 비서실장 등 청와대의 ‘복심’이 이인제 최고위원에서 노무현 고문으로 급격히 돌아섰다는 분석도 있다. 2002년 5월31일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열린 진념 경기도지사후보 지원유세에서 조선일보를 매섭게 질타했다. “저는 조선일보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황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조선일보도 가만 있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응징 수단은 노무현 고문과 대선후보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이인제 최고위원을 띄우는 일, 즉 ‘여권 대선후보 IJ 대세론’ 확산이었다.

‘여, 이인제 후보 굳히기 시작됐나’(2001.9.10) 등의 보도가 줄을 이었고, 이런 반격은 노무현 고문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 정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노무현, ‘남북대화만 성공하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2002년5월29일)는 등의 선정적인 기사가 크게 다뤄졌고, ‘주간 조선’, ‘월간조선’ 같은 자매지들도 노무현 후보의 이념 등을 문제삼는 특집기사들을 잇달아 내보냈다.조선일보는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에 김대중 편집인이 나서 “‘김심’이 노무현 후보에게 쏠린 것 같다”는 이른바 ‘음모론’ 확산에 앞장서기도 했다.

제3차 전쟁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2월25일부터 당장 세 번째 전쟁이 자연스럽게 발발했다. 앞서 소개했듯이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대폭 깎아내린다는 ‘목표’를 세운 노무현 정권과 아마추어 정부, 이념적으로 편향된 정부의 오류를 낱낱이 파헤치겠다고 벼르는 조선일보 사이의 ‘정·언충돌’은 불가피했다. 양측이 벌이는 3차 전쟁을 두고 정치권에선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이 정면으로 부딪쳤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낮의 대통령은 당연히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렇다면 밤의 대통령이란 무슨 뜻일까. 이 용어는 1992년 11월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 칠순 잔치에서 ‘스포츠 조선’ 신동호 사장이 한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회장님을 남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남산에 있는 옛날의 중앙정보부와 현재의 안기부 못지않게 회장님이 계신 태평로 1가(조선일보 사옥)에는 모든 정보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언론과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강조했지만 적어도 조선일보와의 관계에선 ‘건강한’이란 수식어가 ‘적대적’이란 수식어로 대체돼야 할 정도로 사사건건 충돌했고, 그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한 때 청와대 홍보팀이 보수신문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고, 특히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조선일보와의 ‘화해’를 주선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조선일보에 대한 묵은 노기(怒氣)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는 게 청와대 참모들의 귀띔이다. 심지어 모 핵심 참모가 평소 친분이 있는 조선일보 기자들과 저녁에 만나 술을 함께 마신 사실을 안 노무현 대통령이 당사자에게 각별한 주의를 줬다는 얘기도 들린다.특히 최근들어 청와대에서 보수언론, 특히 조선일보를 겨냥한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조선일보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일으키는 조기숙 홍보수석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조 수석은 ‘안티 조선’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김우식 비서실장 등 청와대내 온건실용파의 화해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도 조 수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조선일보 역시 현정부에 백기를 들고 꼬리를 내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최근만 해도 ‘오일 게이트’(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 개발 사업 투자 의혹)와 ‘행담도 게이트’(충남 당진 행담도 개발 의혹)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파장을 확산시키고 있다. 오일 게이트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신문 기사에서 살기(殺氣)를 느낀다”고 한 것은 바로 조선일보를 지칭한 말이다. 이런 사실 외에도 최근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수시로 부딪치는 상황을 보면 양측의 3차 전쟁이 3년째 진행 중임을 읽을 수 있다.

사례1)

조선일보는 5월7일자 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연립여당 간사장들에게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친서내용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지적하며,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도했다. 이어 9일자 사설에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노 대통령이 보낸 친서를 기자들 앞에서 까보이려 했다면 노 대통령 개인은 물론 우리 국민이 입을 자존심의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라며 비난했다. 청와대는 9일 ‘조선일보는 어느 나라 신문인가’라는 제목으로 다른 신문의 7일자 기사와 비교해 반박에 나섰다.

사례2)

조선일보는 5월10일 ‘작년 11월 처음 알았다더니… 작년 8월 보고받아 청와대 유전(油田)거짓말 또 드러나’라는 기사를 1면 톱에 실었다. 그러자 다음날 청와대에서 문재인 민정수석이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문 수석은 “사실관계가 뒤늦게 확인됐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했다는 식으로 악의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면서 법적 대응방침을 밝혔다.‘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지난 두차례 전쟁은 ‘1승1패’라고 볼 수 있다. 1991년의 1차 전쟁은 이유야 어쨌든 노무현 대변인이 소송을 취하했으므로 ‘판정패’였다. 두번째 2001년의 전쟁은 조선일보의 갖가지 시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가 경선과 대선에서 연거푸 승리했으므로 깨끗한 ‘KO승’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3차 전쟁의 최후의 승자는 어느 쪽이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유제성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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