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YS와 무너지는 사람들 ④편
이선희 유세에 ‘아줌마 부대’ 감동의 눈물 흘려그런데 이제는 한술 더 떠 아주 당차다 싶을 정도로 묻는 게 아닌가.
“말씀은 충분히 잘 알아 듣겠습니다. 사실 저는 정치란 것을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거나 상상도 못했습니다. 막상 듣고 보니 솔직히 겁이 납니다. 일단 몇 가지만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만약 출마한다면 당에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지원을 해주시는 겁니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조직과 홍보는 물론 ‘자금’ 지원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질문이 분명했다. 과연 주변에서 ‘당차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을만 했다. 오히려 그렇게 나오니까 내 입장에서는 더 안심이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도록 하고 걱정하시는 부분은 아마 잘 해결될 겁니다. 다만 향후 1개월 동안은 일체의 방송활동과 연예활동은 하실 수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약속을 해주셔야 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갈 것이고 또 상상하는 것 이상 훨씬 강도가 높은 활동이 될 것입니다. 선거가 워낙 힘들다는 것 대충은 아실 것 같고요. 그리고 조직이나 홍보 등의 문제는 당에서 지원해 줄 수밖에 없는 문제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이선희양이 얼마나 빨리 소화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일단 아버님과 상의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어 다음날 바로 또 이선희씨의 아버님을 만났다. 아버님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딸을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지만 걱정이 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걱정 말라 잘 할거다”라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나서 당 지도부에 보고를 하고 이선희씨 공천여부를 상의했다. 당 지도부 역시 아주 좋은 반응이었다. 잘만하면 개인의 당선을 넘어 전체 선거 전략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후보등록을 하려다보니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호적에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고향 충남 대천까지 찾아가 증인을 찾고 당시의 의사를 찾는 한편 치령(치아의 연령)까지 조사해 부랴부랴 재판을 받아 겨우 후보 등록을 마쳤다.
그것으로 일단 내 역할은 끝이 났다. 그러나 막상 출마를 시켜놓고 나니 내심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앳된 모습과 정치경험이 전무한 후보를 당원들과 유권자에게 어떻게 가까이 대하게 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일부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당원들과 마포 선거구 구민들도 있었다. 부정적인 견해는 주로 너무 어리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며칠 후 지구당에서 전화가 왔다.
“장의원님! 대성공입니다! 대성공.”
“뭐야?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이야기좀 해봐.”
“조금 전 당원들 앞에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그런데 강당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고, 아무튼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역시 장 의원님 선택은 이건 완전히 작품이라니까요!”
“그래? 야, 이거 정말 잘 됐구만! 그래 그래 아무튼 잘 지원 해주라구!”
전화를 끊고 나니 나도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인사를 잘했기에 저 난리인가 싶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바쁜 와중에도 다음날 시간을 내서 이선희씨의 유세장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들어봐도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잘하는 게 아닌가!
정치인들의 유세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조근 조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어려웠던 시절이야기며, 연예활동을 하면서 겪은 어려운 이야기며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오기까지의 결심과정이며 결코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할 이야기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하고 있었다.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아가씨였다.
홍보물 또한 유별나게 멋있었다.
처음 당에서 만들어준 홍보물을 보더니 “이것만큼은 저희들이 해보겠습니다”라고 해 그때 까지만 해도 ‘그런가보다’했는데 역시 가수라 다르긴 달랐다. 정치인들의 감각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프로그램을 만든 팀들이 있어 우리 정치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홍보물이었다.
결국 이선희 후보가 잘 한다는 소문이 청와대까지 들어가고 나중에는 김옥숙(노태우 대통령 부인)씨가 지원방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이선희씨는 압승을 했고 시의원으로 의정활동 또한 아주 야무지고 당차게 잘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이선희씨 부부는 그 후에도 우리가족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훗날 내가 이종찬씨 대통령선거 경선 선거운동을 하고 다닐 때 조차 말없이 달려와 지원공연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이종찬씨가 국민회의로 가면서 결국 이선희씨도 그쪽 캠프로 가고 말았으니….
아무튼 최초의 지방자치선거는 이선희씨의 선전을 계기로 민자당에 등을 돌렸던 젊은층의 관심을 끌었고 그런 측면에서 이선희씨가 당에 기여한 공로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선거대책 본부장 이었던 나에게도 큰 성공이었다.
한편으로 당시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원칙을 하나 세웠다. 가뜩이나 거대여당에 대한 견제로 국민여론이 좋지 않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철저히 공명선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관권선거 운운하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에 안기부나 기관장들에게 직접 요청을 했다. 당이 선거를 치를 테니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그 과정에서 선거법위반 사례가 나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잡아내고 구속 등과 같은 법적제제를 받는 일에도 솔선수범을 보였다.
때문에 당시 광주지구당 국회의원이 일시 구속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나는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한 한 지금도 공명선거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였을까. 당의 회의적인 분위기와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첫 지방자치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서울지역의 경우 90%이상이 당선되었으며 호남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승하는 쾌거를 올렸다. 3당 합당을 통한 국회의원200명을 가진 거대여당의 물리적 기반이 위력을 발휘한 결과였다. 결과가 그랬으니 선거대책 본부장 이었던 나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오는 건 당연했다. 하루 종일 나는 여기저기에서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대통령의 격려 전화까지 직접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나의 상기된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전화한통이 왔다.
[다음호에 계속]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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