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누가 부여한 것인가'...'그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가'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1984년 서울연극제 대상 수상을 시작으로 수많은 희곡상을 휩쓴 이강백 작가겸 서울예대 교수의 1993년작 ‘북어대가리’가 이달 23일까지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된다.
연극 ‘북어대가리’는 독일, 일본에서 공연된 적이 있으며 많은 나라에 번역 출간된 이강백 작가의 대표작이다. 1993년 초연 이후 무려 20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공연에 올랐다. ‘북어대가리’의 작품성과 가치를 알고 있던 구태환 연출가는 8년 전부터 이강백 작가에게 재공연을 요청했다고 한다. 구태환 연출가는 오랜 세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를 두고 “작가의 선택이지 않을까. 그만큼 아끼는 명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북어대가리’는 물품 상자를 나르고 보관하는 자앙(배우 박완규)과 기임(배우 김은석)의 관계가 주된 내용이다. 연극은 표면적으로 직업에 대한 애착과 양심, 지나친 사명감과 융통성과의 대립 등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부분이 강렬하게 다가올지는 관객들의 몫이다.

극중 동료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고 매사에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자앙은 반복적인 일에 지쳐 현재 너머의 인생을 그리는 기임과 일생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날 두 창고지기 사이에 미스다링(배우 박수현)과 트럭운전수(배우 김종구)가 개입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미스다링은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남자관계를 가진 여성으로 자앙과 기임의 마음을 좌지우지 한다. 미스다링의 아버지 또한 화통하고 낙천적인 인물로 창고지기들과 크게 비교된다.
‘북어대가리’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자앙의 꼼꼼함과 일에 대한 열정은 현대인들이 본받아야할 태도로 보인다. 자앙의 모습은 수시로 투덜거리고 시간 때울 궁리만 하는 동료 기임을 한심한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중반 이후 자앙의 완벽주의에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관객들은 그의 숨겨진 면모를 관찰하게 된다.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심각하고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자앙은 고생을 자처하면서 이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발버둥친다. 이런 그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 또는 관객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자앙을 동정할 수도 있고, 스스로 가둔 원칙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 답답함, 과도한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는 집착 등을 엿볼 수도 있다.
이 같은 전개는 어떤 이유로든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 초심의 변질은 그 사람의 나태함, 일에 휘둘리고 마는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다. 결심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사회, 조직원간의 갈등 역시 상당부분 차지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접근하면 순수했던 초심이 매번 옳았던 것만도 아니다.
‘북어대가리’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다. 작품이 탄생했던 1990년대 초반은 고도 산업화의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되던 시기였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변할지 감 잡을 수 없을 만큼 각박하게 흘러가는 2012년은 과거보다 주제를 더 크게 부각시킨다. 구태환 연출가의 말처럼 선경지명이 있는 작품이다. 착한 품성과 배려가 오해를 사는 경우, 조직에 대한 충성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노력과 희생의 보상이 따르지 않는 경우 모두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부조리다.

구태환 연출가는 “내가 굉장히 열심히 한 일이 남에게 해가될 수 있으며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말로 ‘북어대가리’가 표현하는 ‘가치의 혼란’을 설명했다.
‘북어대가리’의 부조리함은 최근 ‘제69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영화감독의 ‘피에타’와도 공통점을 띈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상업성과 거리가 있는 작품이 연극과 영화로 관객들을 맞이한 셈이다.
‘피에타’는 ‘북어대가리’보다 더 극단적인 소재와 잔인한 장면을 통해 부조리를 고발한다. 관객들은 고도 산업화의 희생양이 된 청계천 공장 노동자들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사회에 먹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돈에 의해 가치가 뒤집힌 현실을 실감한다.
생존과 돈을 위해 괴물 사채업자가 된 ‘피에타’ 주인공 이강도나 불투명한 가치에 올인하는 자앙은 모두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고도 산업화 사회에서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는 두 인물들에게서는 현재 종사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 시대에 뒤처진 일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 등 흔한 고민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이강도에 비해 자앙은 주변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강도와 자앙의 특징은 오래된 관성으로 일을 하면서도 더 나은 생활이 있다고 믿는 기임보다 어떤 면에서 더 불행하다. 기임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지냈던 것처럼 창고 세계에 익숙하지만, ‘밖에는 뭔가 더 있다.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하고 계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결국 그 기회가 불완전함에도 붙잡는다. 기임의 행동은 시도 자체로도 잠시나마 부조리를 던져버리는 모습이 된다.
이 때문에, 기임이 연극 전체적으로 자앙의 탄탄한 캐릭터와 비교해 허술한 인물로 비춰지는 것은 다소 의문이다. 더 나은 생을 꿈꾸는 기임의 바람은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신념과 동등하게 비춰져야 하지만, 극에서 기임은 다른 일을 맡게 되더라도 금방 포기해버리는, 신뢰를 전혀 줄수 없는 인물로 보인다. 도박에서 돈을 모두 잃고, 이유 없이 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미루어, 기임이 꿈꾸는 목표는 단지 현재가 싫어 앞뒤 안 가리고 도피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물론 원치 않는 일을 아주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이들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기에 충분하다.
‘북어대가리’에 등장하는 배우 박완규, 김은석, 김종구, 박수현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트럭 운전수로 분한 김종구와 미스다링 박수현의 연기가 조금 더 인상 깊었다. 김종구는 영화 ‘시’, ‘푸른소금’, ‘카운트다운’, ‘범죄와의 전쟁’, ‘내가 살인범이다’ 등에도 출연한 베테랑이다. 반면 박수현은 연극 ‘삼봉이발소’ 이후 이번이 데뷔 두 번째 작품이다. 박수현은 극 속에서 남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외모와 행동으로 풋풋함과 섹시함을 발산한다. 자연스러운 타이밍에서 터지는 노출도 예상 밖 볼거리다.
이창환 기자 hojj@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