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YS와 무너지는 사람들 ②편
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YS와 무너지는 사람들 ②편
  • 장경우 기자
  • 입력 2011-06-07 13:29
  • 승인 2011.06.07 13:29
  • 호수 892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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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제합의각서 파문 밀실정치 전형”

3당 합당 당사 ‘여의도 소재’ 정당 근거지
지분, 민정당 5 민주당 3 공화당 2 나눠


[장경우 전 국회의원] = 나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3당 합당의 실무 작업에 뛰어들었다. 3당에 각각 5명씩 15명으로 ‘3당 합당 실무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나는 또 일복이 터져 간사를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 복잡하고 방대한 3당 합당의 구체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의 명칭, 당권·당규 제정, 주요 당직자 결정, 3당의 자산 및 부채 통합문제, 당직자 정리및 인선 문제 등등 처리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새로 당을 하나 만드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런데 세상사 인심이 조석(朝變夕改)으로 변한다더니 정말 무섭게 변했다.

여소야대때는 그래도 민정당에 대한 국민적 동정이 있었는데 3당 합당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심지어는 새로운 당사를 마련하는데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건물주들이 쉽게 임대를 안 해주는 것이었다. 3당 합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분명 당사 앞에 연일 시위가 벌어질 것이 뻔한데 건물도 손상을 입을 것이고 하루가 멀게 시위대들이 모여 들테니 건물주는 물론 주변 상가들 모두가 내심 자기근처에 오는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회의원 200여 명을 가진 거대정당이 들어갈 사무실이 쉽게 나타날리도 없었다. 아예 빌딩 전체를 빌려야 하는데 그런 건물도 없을뿐더러 그 와중에 금융연수원, 구 경기고등학교, 창덕 여고 자리까지 물망에 오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오랜 물색 끝에 결국은 여의도에 있던 한 빌딩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을 모두 가락동 연수원으로 이전을 시켜주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의도에는 정당사무실이 없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모든 정당이 여의도를 근거로 삼게 되었다.

합당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건 역시 ‘지분’ 문제였다.

긴 논의 끝에 민정당이 5, 민주당이 3, 신민주공화당이 2, 결국 5:3:2라는 당대 당 통합지분이 결정되었다. 3당의 3인 대표는 모두 최고위원으로 추대되고 후에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당 총재로 취임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김영삼씨가 대표최고위원, 김종필씨와 박태준씨를 최고위원으로 추대키로 했다.

주요 당직자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각 당의 지분대로 나뉘어졌다. 가령 조직 1국장은 민정계가 하고 2국장은 민주계, 3국장은 공화계가 하는 식이었고 총무국장이 민정계면 부국장은 민주계 등으로 하는 식이었다.

훗날에서야 드러난 문제지만 이렇게 철저히 물리적인 결합을 시켜놨기 때문에 결국 당안에 존재하는 ‘계파’사이에는 끝내 넘지 못하는 벽이 있었다.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라는 말이 하나의 독립된 ‘당’처럼 엄연히 당 안의 분위기를 갈라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명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합당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웬만큼 조정이 되었고 드디어 ‘민주자유당’ 즉, ‘민자당’이 탄생되었다.

불과 120여 석에 불과하던 여당의 의석수가 하루아침에 200석이 넘어버리는 초유의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막상 3당 합당이 되고 나자 국민들의 비판이 높아졌다.

평민당은 그전에 이미 당명을 신민당으로 바꾼 상태였는데 이제 유일한 야당이 되어버려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해도 너무 했다”는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었다. 사실 나도 몇 가지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과반수만 되어도 국정운영에는 큰 무리가 없을 텐데 굳이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거대여당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거 정말 개헌으로 가는 것 아냐?’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런 의심을 할만 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새로운 당의 강령을 만드는 작업에서 드러났다. 대부분의 정당들은 강령을 만들 때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당이 된다”는 대목을 넣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대목이 나오면 당시 공화당의 김용환 정책위의장 등이 이것을 자꾸만 “정부와 내각이 함께 책임지는”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표현하려는지 모르겠다”며 심드렁했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은 분명 “개헌을 목표로 한 합당”이고 그 개헌은 다름 아닌 ‘내각제’가 분명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박준병 사무총장이 중요한 일이 있다며 김종필 최고위원을 찾아 안양의 골프장까지 가서 ‘무엇’인가를 받아왔다. 그리고는 가져온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보관해두었다. 김영삼 최고위원에게도 무엇인가를 받아온 것 같았다.

나중에 중앙일보가 특종 했던 ‘내각제 합의각서’라는 것이 터졌을 때 나는 그제서야 ‘아, 그때 그것이 바로 그것 이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항간에는 그것이 “가짜다”,“아니다” 말들이 무성하고 또 그것이 구체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어떻든 분명한 것은 ‘내각제’합의를 바탕으로 3당이 합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다.

설령 ‘좋다. 내각제하자, 했다 해도 왜 이것을 국민에게 공표하고 공개리에 합당하지는 못했던 걸까? 꼭 굳이 밀실 정치라는 말처럼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그렇게만 했다면 훗날 문제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내각제로 갈수 있었을 텐데 왜 꼭 굳이 그렇게 숨겨야만 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우리나라 ‘밀실정치의 폐단’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조건’과 ‘저의’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 합당의 목표는 무산된 셈이다.

얼마 후부터 김영삼씨는 본격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를 부르짖기 시작했고 그 유명한 말인(명언을 남겼다) “호랑이를 잡기위해 호랑이굴로 들어 간다”는 말 그대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50여 명이라는 소수계파를 이끌고 그것도 120여 석의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 가지고 있는 구 민정당(민정계)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 사건은 우리 정치사 속의 하나의 ‘이변’임과 동시에 김영삼씨의 엄청난 집념과 정치력에 혀를 내두를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어떻든 한지붕 아래서 잉태되고 있는 그런 다양한 동상이몽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장경우 기자 kwa8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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