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장성택이 몸을 한껏 낮춰 중국을 방문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란에서 열리는 비동맹회의에 참석하고 일본과도 준당국자간 대화를 재개하는 등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북한은 일본과의 접촉을 조금씩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모색하고 있다”며 “북한과 일본 적십자가 일본인 유골문제를 놓고 의견 접근을 이룬 것은 북일 간 국교정상화까지 염두에 둔 전초전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다 최근 독도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간 첨예한 외교분쟁이 가열된 가운데 일본 정부가 모든 대(對)한국 제재 조치를 강구하면서 북일수교로 한국정부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외교 전략을 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북한은 만성적인 식량난도 가중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연간 곡물 생산량이 지난 봄 가뭄으로 70만t 이상 감소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상적인 곡물생산에도 식량난을 제대로 넘기지 못할 정도인데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도 대폭 줄어든 탓에 대규모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부터 북한 황해도 지역에 군량미를 우선적으로 공출하면서 지난 6월 황해도에서 주민 아사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대외 경제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악의 국면까지 이르렀다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북한 권력 수뇌부들이 직접 중국과 비동맹 국가를 상대로 자원, 경협 외교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의 방중, 중국식 개혁개방 한계 재확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명실상부 ‘실세', ‘2인자’로 부상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은 체제 구축 이후 중국을 찾은 최고위급 인사임에도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장 부장의 중국 방문을 국내외 일각에선 김정은의 방중 정상회담에 앞서 대규모 차관이나 경제 지원 확보를 매듭짓기 위한 것이라는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가 중국 최고지도부를 대면한 자리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선물보따리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정보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간 진척을 보이지 않던 황금평과 위화도 경제지대가 정상적으로 개발되도록 이끌어낸 것은 그나마 적지 않은 수확이다. 이는 중국 지도부의 대북 경협 의지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장 부장의 방중 최대 성과로 꼽힌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성택의 귀국 보따리에는 선물만 담겨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며 “다만 6.28 조치로 알려진 북한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추진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 조치의 성공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 경우 중국은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최완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북한은 중국에 손을 벌일 때마다 개혁개방을 요구받고 있지만 실상 개혁에 면역력이 취약해 생전에 김정일은 ‘우리 식’개혁개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며 “북한 권력층이 지속적으로 개혁개방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내구력의 원천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뜬금없이 피어오른 북일수교설
이 와중에 북일 정상회담 가능상이 제기된 것은 올해 초 마쓰바라 진(松原仁) 납치문제담당상이 지난 24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최종적으로 (일본)총리와 대화하길 바란다”며 “그 전제가 될 토대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밝히면서다.
그의 발언은 일본이 자국내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일본인 피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일 정상회담까지 고려해 다양하게 실무접촉을 벌이겠다는 사전포석이었다.
일본인 피랍문제는 10여전 넘는 북일 간에 골깊은 숙제였다. 지난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일본인 납치사실 인정’이라는 성과를 끌어낸 적이 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내각의 지지도가 떨어질 때마다 북한이 납치해간 일본인 문제를 꺼내들고 정권 지지율 반등의 호재로 활용해 왔다.
이번 노다 내각에서도 역시 같은 수법으로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선 데에는 정권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일본 정부가 올해 초부터 북일 정상회담을 띄웠지만 사실상 지난해부터 북한과 ‘다면적인 접촉’을 시도해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 추진 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지난해 11월 북일축구 시합 관전을 내세워 방북하려다 포기한 적이 있고, 지난 1월에는 나카이 히로시(中井洽) 전 납치문제담당상이 중국 선양(瀋陽)에서 북한의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 대사를 비밀리에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나카이-송일호 접촉에 대해 “비공식적인 접촉”이라고 일축하면서도 “앞으로 북한과 교섭이 있게 되면 내가 정부 대표로 나갈 것”이라고 입장을 내놓았다. 이는 대북 채널을 계속해서 살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일 외교분쟁이 격화되면서 노다 내각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대북 관계 접촉을 늘려가고 있다. 여기에 對한국 제재와 맞물려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힌 뒤 통화 스와프 문제외에도 북일 국교정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설(設)이 외교가에 퍼졌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개혁개방 움직임을 보이면서 일본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고 단계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제 과거사 보상과 배상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예민하게 받아 들이는 북한 문제로 신경을 건드리는 동시에 자국 내 미완의 고민거리인 일본 납치문제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로 지지율 상승을 노리고 있다. 최근 북일 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데다 한국 정부를 조금이라도 코너에 몰아넣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일 국교정상화는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처럼 요원한 설(設)에 불과하다. 앞으로 수교로 이어지기까지 양국이 풀어야 난제는 복잡다단하고 접근 방법에서도 동상이몽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당장에 북일 수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접근 방법에서 북한은 일본 과거사로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메구미 납치를 비롯해 자국민 피랍문제를 강조하고 있다”며 “6자회담에서도 북일 관계를 보면 핵문제를 놓고 대립이 치열하기 때문에 양측이 관계 정상화로 가기까지는 많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내다봤다.
김정은 체제 구축 이후 동북아 주변 외교를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북한의 광폭 외교행보에도 성과는 아직 이렇다 할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미비하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핵 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과 관계 개선을 풀지 않고선 생존이든 경제 지원이든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대북 전문가들 일각에선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따라가지 못하고 미국과 한국의 지원을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한반도 정세를 다시 긴장 국면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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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