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그가 털어놓는 일화 한토막. 대우그룹이 안정기에 접어든 지난 90년대 초. 대우그룹 내부에서는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주)대우 사장으로 있던 추호석씨, 국회의원 출신인 이재명 전 대우기전 사장, 대우전자 사장이던 전주범씨 등이 김우중 회장을 대신할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시 소문의 골자. 당시만 해도 김 회장 주변에는 쟁쟁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자식들은 아직 어려 경영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사돈인 김준성 전 총리(현 이수그룹 명예회장)가 (주)대우의 회장으로 있었고, 사위인 김상범(현 이수그룹 회장)씨가 (주)대우 기획조정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큰형인 관중씨가 관계사인 대창기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동생 성중씨도 대우정밀 임원을 거쳐 대우자동차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고교 선배인 K씨와 P씨가 재단이사장과 계열사 사장으로 김 회장을 보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호석사장과 이재명사장, 전주범사장은 공공연하게 그룹 내에서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비서실 출신으로 김 회장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승진 속도도 빨라 부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는데 5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일부의 경우 아예 진급 단계를 무시한 채 이사에서 바로 사장으로 발령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룹 내에서 이같은 소문이 나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김 회장도 평소 “후계자는 40대의 젊은 사람이 중용될 것”이라는 뜻을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때문에 그룹 내부에서는 이들의 초고속 승진이 차기 후계자 선정을 위한 전초작업이 아니겠냐는 인식이 팽배했다. 물론 이들이 후계자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곧이어 터진 92년 대선과 세계경영이 가속화되면서 후계자 선정 작업은 흐지부지됐다. “당시만 해도 ‘대우=김우중’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세계 경영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김 회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김 회장이 후계자 선정을 잠시 미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95년부터는 집합회장 제도가 도입됐다. 이 제도는 계열사별로 회장제를 실시해 회사를 독립체산제 형식으로 나누는 것. 김 전 본부장은 이같은 제도의 도입도 후계자 선정을 위한 김 회장의 판단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2년여 정도 이 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도 도입 이후 김 회장과 호칭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 계열사 회장은 그냥 ‘회장’으로 부르고 김 회장은 ‘왕회장’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집합회장 제도도 별다른 실효성이 없이 2년만에 흐지부지 됐습니다.” 김 전 본부장에 따르면 김 회장의 장남 선재씨도 이즈음부터 경영수업을 쌓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장남에 대한 김 회장의 기대는 일반인들의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선재씨는 우선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우자동차 특례병으로 근무했다.
김 회장은 선재씨가 학교를 졸업하면 대우재단에 입사시켜 전문경영인으로 키울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재씨가 유학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이같은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차남인 선엽씨도 경영수업을 위해 대우자동차 수습사원으로 입사했지만 그룹이 붕괴되면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김 회장은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김 회장은 대우재단에 계열사 지분을 포함한 재산을 거의 환원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재산을 물려주려 해도 물려줄 게 없었습니다. 대신 자식들에게는 경영수업을 쌓아 전문경영인으로 키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물거품이 되면서 많이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이렇듯 김우중 회장은 경영에 관한 한 철저하게 친인척이나 지인들을 배제했다. 심지어 자식들도 전문경영인으로 키울 생각은 했었지만, 후계자로 지목하지는 않았다는 게 김 전 본부장의 증언이다.
이석 suk@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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