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ㅣ조기성 기자] 이명박 정부에서 ‘개헌 전도사’를 자임했던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다시금 개헌 드라이브를 걸면서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이 무산되면서 출마 포기를 선언했던 이 의원이 자신의 대선 1호 공약인 ‘분권형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의원은 당내 비박(非朴·비박근혜) 주자들과의 회동을 갖은 것은 물론이고 김두관 전 경남지사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 야권 대선주자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안 원장이 ‘개헌’에 힘을 실어줄 경우 대선 국면의 엄청난 태풍이 밀려올 것이라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의원이 ‘개헌’ 이슈를 공론화시킴으로써 대선을 앞두고 ‘反박근혜 전선’을 형성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여야 대선주자들, 이재오 만난 후 ‘개헌’ 주장
이 의원은 최근 김문수, 임태희, 김태호 등 비박 주자들과 잇따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원이 이들에게 ‘개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의원과 회동 이후 비박 주자인 임태희, 김태호 후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난 22일 일제히 개헌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태호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1987년 체제의 산물인 5년 단임제는 장기집권을 막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나 생명을 다했다”며 “5년 단임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 대안으로 결선투표제와 동시에 4년 중임의 정·부통령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태희 후보도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 6년 단임제’를 도입하는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대통령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 가령 세종시로 이전하는 부처를 국무총리가 실질적으로 지휘하도록 하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외적 문제 등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강조했다.
이 의원이 주장하는 분권형 개헌과 일맥상통하는 주장들이다.
민주통합당에서도 김두관 후보와 정세균 후보가 한목소리로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재오 의원의 최측근인 김해진 전 특임차관이 김두관, 정세균 캠프관계자들과의 잇단 회동이 있은 이후의 일이다.
김두관 후보 역시 같은 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 한 사람에게 ‘대한민국호’라는 큰 배를 맡길 수 없다”며 “개인적으로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김 후보는 현 대통령 5년 단임제에 대해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고 있으며, 임기 3년이 지나면 레임덕으로 국정이 마비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면서 “5년 단임제는 이미 수명을 다 했다. 새로운 권력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후보의 이 같은 주장은 이재오 의원의 이원집정부제 개헌론과 사실상 맥을 같이 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정세균 후보도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재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돼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이 많다. 전직 대통령들의 임기 후 처한 상황을 고려해 보더라도 권한을 축소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대선 이후로 논의를 미루지 말고 19대 국회에 당장 개헌특위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예비후보들도 개헌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이를 수렴해 개헌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개헌 논의 반대
한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개헌론에 대해 원칙적으로 4년 중임제를 선호하지만, 대선기간에 개헌론을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앞서 박 후보는 야당(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7월 17일 “국가 정책의 연속성과 책임정치,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데 있어 4년 중임제가 낫다”면서 “개헌을 한다면 4년 중임제로 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개헌 논의시기에 대해 ‘박근혜 경선캠프’의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은 “가을 추수를 해야 할 때에 모내기를 하자고 할 수 있나”라며 “집권 후 개헌을 논의하겠다는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이번 대선에 개헌을 언급하면 모든 대선 이슈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고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캠프 관계자도 “국민의 삶을 강조한 박 의원이 권력구조 개편을 이슈로 들고 나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박 후보로선 자신의 소신인 4년 중임제로의 개헌은 자신이 대권을 장악한 이후의 프로세스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대선국면에서 ‘개헌논의’가 이슈로 부각되는 것은 대선지형을 흔들려고 하는 꼼수로 바라보는 것이다.
安, ‘개헌’ 힘 실어주면
이재오 의원의 개헌 주장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안철수 원장이다. ‘개헌’을 매개로 대선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포지션을 점한 안 원장에 대한 ‘러브콜’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 원장 역시 ‘개헌’을 명분으로 이재오 의원 등 친이계와의 결속 가능성도 ‘변수’로 배제하기 어렵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대권도전을 선언하며 ‘박정희와 노무현을 넘어서자’며 사실상 박근혜에겐 킹메이커가 돼주길 희망했고 친노의 대표주자인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은 또 다른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누리당 안에서, 민주당 안에서, 그리고 두 당의 밖에서, 국민 모두가 ‘탈 대립’의 울림을 합창해야 한다”며 “그래서 안철수 교수께 제안한다. 당과 집단에 대한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 시대에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 목소리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임 전 실장의 이번 대권출마선언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의를 보이기보단 안철수 원장의 결단을 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 듯 해 사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이재오 의원과 임 전 실장의 출마선언에서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친이계가 ‘개헌’을 고리로 ‘안철수’와 결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안철수 현상’에서 드러난 국민들의 새정치에 대한 욕구가 실현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개헌’ 뿐이다. 87체제가 6월 민주항쟁에서 비롯된 5공화국 헌법 개헌에서 출발했다면 ‘87체제’의 종말 또한 6공화국 헌법 개헌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적 포지션을 가진 유일한 정치인이 현재 ‘안철수’이다.
이렇듯 이재오 의원의 개헌 주장에 ‘안철수’가 힘을 실어준다면 2012년 대선국면은 ‘태풍’ 속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새정치에 대한 욕구를 담아내고 있는 안철수 원장만이 현재 개헌정국을 이끌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여야 진영대립구도와 지역구도의 정치를 청산하겠다는 명분으로 ‘개헌’을 들고 나올 경우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 이 파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안 원장은 최근 발간한 저서를 통해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게 아니라 견제장치가 잘 작동하게 돼 있다”면서 “권력의 집중화를 견제하는 기관들을 지금부터라도 잘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헌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한 세력이 여러 번의 여론조사에서 일정 부분 드러났듯이 중도지향, 온건합리주의 성향, 수도권으로 여야지지층에 걸쳐 있는 계층들이다. 이들이 바로 ‘안철수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핵이기도 하다. 반면 개헌에 부정적 여론이 강한 쪽은 영호남과 여야 적극 지지층으로 진영구도에 강하게 결속돼 있다.
‘안철수 현상’이 몰아칠 당시 진영에 갇혀 있지 않는 안 원장에게 ‘개헌’은 양 진영을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있어왔다. ‘안철수 정치세력’과 연대를 강하게 원하는 민주당 등 야권은 안철수의 개헌 제안을 무시할 수 없다.
민주당과 안철수 원장이 ‘87체제’를 대체한 ‘2013체제’를 연다는 명분하에 ‘개헌’을 매개로 결합할 경우 가장 타격을 입는 쪽은 다름 아닌 박근혜 후보다. 수도권과 중간층, 합리적 보수세력의 이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재오 의원의 계속된 개헌 주장에 친박(친박근혜)계가 ‘박근혜 흔들기’라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