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3당 합당이 남긴것 2탄-추장들의 나라 ⑥편

[장경우 전 국회의원]= 한때 연속극 최고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제목처럼 80년대 우리사회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모래시계 세대’를 자처했다. 이른바 ‘4·19세대’,‘6·3세대’하는 식으로 한 시대를 지칭하기에 이른 것이 ‘모래시계 세대’다. 글쎄, 나는 80년대의 젊은이들을 가르키는 용어로 이 말이 적합할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선명성도 부족할 뿐 만 아니라 그 시대의 정체성을 담아내기엔 너무 적합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광주’로 상징되는 80년대의 젊음들을 뭐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그것은 후일 역사에 미루기로 한다.
내가 여기에서 굳이 80년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른바 80년대의 회오리속에 나 역시 끼어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당시 여당 국회의원으로서 80년대 젊은이들이 말하는 타도 대상이었다. 모래시계 세대와 대치점에 선 6·3세대, 바로 이것은 나의 불행이고 곧 우리시대의 불행이었다. 민정당은 이재형 대표의 사임과 함께 진의종 전 총리가 당대표로 취임을 했다.
당시 진의종 대표는 운경 이재형 선생과 학교 선후배 관계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또 당시 당의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진의종 새대표는 나에게 계속 보좌역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국회의원이 된지 벌써 2년인데 이제 좀 다른 곳에 가서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정중하게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그럼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부대변인을 시켜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내가 그때 굳이 부대변인을 원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나는 당 출입 기자들을 볼 때마다 “참 할 일없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신문이나 뒤적이면서 농담하거나 둘러앉아 바둑이나 두고 심지어는 낮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을 보면 언제 어디서 그렇게들 알아냈는지 나오는 기사들마다 무슨 첩보원이 따로 없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기자들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한때 신문기자가 되어보려고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던 차에 기자와 기사(정치기사)에 대한 관심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당대표실에 들르는 기자들은 물론 많은 기자분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선뜻 부대변인을 선택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공부하고 싶었다.
민정당을 점거하라!
부대변인을 시켜달라는 나의 청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바로 그 얼마 후 진의종 대표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후임으로 정래혁씨가 낙점 되었으나 취임 한 달도 못되어 정치적인 숙적이라 할 문형태 전의원의 투서에 의해 정치현장을 떠나야만했고 바로 그 뒤를 이어온 분이 권익현씨였다.
권익현 대표시절 당 대변인은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이자 대구에 지역구를 갖고 있던 김용태씨였다. 대구에 지역구가 있다보니 귀향이 잦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변인 귀향시, 부재시 중앙당에서 대 언론활동은 부대변인인 내가 전담할 때가 많았다.
나에게는 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큰 사건을 겪게 되었다. 바로 ‘민정당 당사 난입사건’이었다.
당시 민정당 당사는 관훈동이었다. 종로경찰서가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날 나는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한가한 틈을 타 이발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막 당사앞에 도착하는 순간 당사 앞에서 갑자기 몇십 명의 사람들이 “와”하는 함성과 함께 후다다닥 달려오더니 당사로 뛰어들어가는게 아닌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있는데 불과 십초도 안돼 몇십 명의 전경들이 그 뒤를 이어 당사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곤 동시에 터져나오는 “탕!탕!” 소리. 순식간에 당사 앞은 최루탄가스로 뒤덮혔다.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일단 당사로 들어갔다. 당사 안은 입구에서부터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흡사 연막을 터뜨려 놓은 것처럼 사방이 뿌했다. 또 여기저기에서 탕!탕!거리는 소리, 고함소리, 무엇을 무너뜨리는지 부수는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당사를 울려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바로 뒤를 이어 완전무장한 전경들까지 새까맣게 당사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서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었다. 연달아 터지는 최루가스와 당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란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겨우 당사를 빠져나와 건너편에 있던 부속건물로 들어갔다. 강당으로 쓰던 건물이었다. 당직자들과 당사안에 있던 사람들도 강당으로 몰려들어왔다.
잠시 후에야 우리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련의 대학생들이 민정당사를 점거해버린 것이다. 당시 9층건물이었던 당사의 맨 위층은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과 의원 휴게실이 있었다. 학생들은 바로 그곳을 점거한 것이다. 학생들의 기민성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였다.
불과 몇분사이에 언제 그토록 빨리 그곳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9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폭이 무척 좁은 곳이다. 3명정도가 서면 꽉 찰 정도. 엘리베이터도 5명 정원의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학생들의 점거농성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만큼 외부로부터의 차단이 용이했던 것이다. 하필 또 9층만은 계단입구가 쇠문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쇠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9층에서 고정시켜놓으면 병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소용없었던 것이다. 치밀한 사전답사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대체로 다섯가지였다.
“광주학살주범 처단”
“민정당 가락동연수원 침입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즉각 석방”
이 모든 사태의 책임주체인 민정당의 당직자 총사퇴 등이었다.
지금 당장 해결이 가능한 사안도 아니었고 학생들 역시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민정당의 점거농성이 갖는 상징성과 언론의 주목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당사 안은 이미 전쟁을 치르고 난 것과 같은 폐허의 모습인데 그 상태에서 전경들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의원들도 하나둘씩 당사의 강당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kwa815@naver.com
장경우 전 국회의원 기자 kwa8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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