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3당 합당이 남긴것 2탄-추장들의 나라 ④편
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3당 합당이 남긴것 2탄-추장들의 나라 ④편
  • 장경우 전 국회의원
  • 입력 2011-04-26 12:48
  • 승인 2011.04.26 12:48
  • 호수 886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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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민정당 ‘발칵’
권정달 사무총장 ‘이-장사건’ 연루설 ‘후폭풍’
이재형 대표 “청와대에 전화 넣어라” 중대 결심


[장경우 전 국회의원] = 나중에는 이대로 있다가 일이 더 커지겠다고 판단했는지 권정달 사무총장과 이종찬 원내총무 등이 이재형 대표의 사가를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노여움 때문에 칭병한게 분명했는데 나중에는 정말 병이 나버린 것이다. 일종의 내출혈로 구혈과 하열이 이어졌다. 결국 이 대표는 입원을 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홧병’ 정도로 생각했던 주변사람들이 모두 병원으로 달려오고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다행히 병이 더 진행 되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실세들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11대 국회가 개원했다. 그날 아침 나는 서둘러 이 대표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병원문을 열고 막 들어서는 순간 이게 또 웬일인가.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이 대표가 상당히 흥분된 얼굴로 막 걸어나오는 게 아닌가.

“아니, 선생님, 지금 어디…”
“가자! 국회가 개원했다는데 당 대표인 내가 빠져서는 안되지! 따라와!”
나는 어찌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미처 붙잡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는데 곧바로 이 대표의 사모님과 형제분들이 뒤쫓아 왔다. 알고 보니 이미 그날 새벽부터 국회에 가신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간호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링겔을 손수 다 뽑아 버리고 막 나오는 길목에서 나와 맞닥뜨린 것이다.
“선생님! 제발 오늘은 안됩니다. 제가 내일은 기필코 모시고 갈테니 제발 오늘만은…하루만 더 계셔 주십시오. 제발 선생님!”

나는 운경 선생(이 대표 아호)의 그런 모습은 그날 처음 봤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병원으로 다시 모셔 놓자 그제서야 운경 선생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장 보좌역! 내가 10년만에 기지개를 켜고 다시 나올 땐 이꼴 보자고 나온 게 아닌데 말이야…이러자고 긴잠에서 깨어난 게 아닌데 말이야…”
(이 대표는 제헌 국회 의원으로서 정치를 시작했고, 자유당 시절 장관을 했고 자유당 탈당 후 신민당을 거친다. 이후 당 대표경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 했고 10년 쉬다가 5공 정권에서 간청하여 다시 정치를 시작했다.)

처음 노여움 때문에 시작 된 병이 정말 병이 되고 난 후 운경 선생은 자주 그렇게 말씀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이재형 선생의 와병은 불쾌감과 모욕감과 후회와 자괴감이 얽혀 만들어 낸 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당시 당 주변에서는 운경선생의 와병을 놓고 ‘국회 의장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물론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세계란 다 그런 것이니 말이다.

단임제를 지켜라

다행히 이 대표는 쾌차되어 퇴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표로서 11대 국회 첫 연설 할 시간이 되었다. 관계자들의 자문을 받아 연설문을 작성해 사직동 자택을 찾았다.

“그래 연설문 준비는 다 되었나(?) 한 번 읽어 봐!”
나는 초고문을 읽었다. 그런데 초고문을 다 들은 이 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로는 안돼! 지금부터 받아 적고 그걸 마지막에 추가 하도록 해!”
그런데 내가 받아적은 추가 원고는 이런 것이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그리고 국무총리 이하 국무 위원 여러분! 정치에는 절대적 완성이란 없는 것 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우리는 제 5공화국도 이제 막 출범한 것이지 완전하게 정비 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던 ‘세네갈의 생고드 대통령’이 이를 고사하고 물러났을 때 전세계의 민주 시민들은 크나큰 감명을 받고 동시에 한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제 다가올 1988년 2월 어느날, 단 한번의 임기가 끝나자 토착화 된 민주주의에 의해 교체된 새 정권을 뒤로 하고 활짝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두 손을 흔들며 청와대를 물러나는 57세의 정치인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전 세계 인류는 보다 큰 감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받아 적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한 마디로 이것은 단임제 대통령 약속을 지키라는 이 대표의 역사적 경고였다. 물론 전두환 대통령은 단임제 약속을 천명 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나서서 그 약속을 지킬 것을 거론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여당 대표가 이런 말을 한다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표 연설은 연설문에서 토씨하나 빠지지 않고 다 진행 되었다. 아예 당 대표 연설을 통해 ‘단임제’ 약속을 다시 한 번 못박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국회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침묵은 당내로 연결되었다. 그때부터 야당은 서서히“ 단임제 약속 재확인”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 했는데 당은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 했다. 이미 정국을 주도 하고 있는 민정당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사실 그 문제에 관해 맞장구 치며 뭐라고 대꾸 해봤자 이익이 될게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이 대표와 당 실세들간의 긴장 관계는 더욱 더 고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재형 대표의 마지막 상소

그 뒤에도 민정당은 순풍에 돛단 듯이 일사천리로 정국을 주도 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민주화의 열기는 고조 되었고 민정당 당사 학생 시위대 사건 등 시위와 집회로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때 흡사 기름에 불을 붙이 듯 일대 파란을 몰고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다. 나는 당시 재무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거의 ‘이-장’ 사건으로 날을 지새다시피 했다. 어음사기 사건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정부고위인사 개입설은 과연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어느 선인지 정국은 혼미한데 소문은 끝이 없었다. 민정당의 실세로 막강한 권력을 구가하던 권 사무총장의 연루설까지 퍼지면서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예고하는 가운데 나웅배 재무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사태까지 번졌다.
하루는 이 대표께서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전화 좀 넣게.”
“예?”
“면담 요청해!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최소한 민심의 소재라도 알려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 대표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역시 청와대의 대문이 높기는 높았다.
“장세동 경호실장이 연락 할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과연 다음날 장세동 경호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 사직동 자택에 계시면 모시러 갈 겁니다.”

[다음호에 계속]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장경우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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