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조-삼성측 사전교감설
하지만 홍 고검장은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노회찬 의원의 실명 거론 이후 김상희 법무차관은 전격 사퇴했고, 안강민·김진환 전 서울지검장은 노 의원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를 했지만 그는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현직이라는 부담과 함께 범삼성가의 핵심 인사라는 사실이 그의 독자 행보를 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그런 그가 최근 검찰 내부 통신망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사퇴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홍 고검장은 1일 ‘검찰 가족 여러분께’라는 A4 용지 7장 분량의 글을 통해 “삼성 떡값을 돌리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은 적이 결코 없고 검사들에게 나눠준 사실도 없다”며 “삼성 회장이나 중앙일보 사장이 무엇이 아쉬워 처남(동생)으로 하여금 후배 검사들에게 로비를 시켰겠는지 상식적으로 판단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만일 지금 그만둔다면 터무니없는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주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의심받는 후배 검사들의 명예도 문제가 된다”고 밝혔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동시에 결백한 만큼 사퇴할 뜻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 그렇다면 홍 고검장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왜 이 시점에서 자신의 결백과 사퇴 불가 입장을 밝혔을까. 이와관련,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안기부 X파일’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추이와 자체 법률 검토 끝에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X파일에 등장하는 인사들의 대화 내용 및 그 진위 여부를 입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 관계자는 분석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홍 고검장이 삼성측과의 사전 조율 내지는 교감속에 입장을 피력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X파일 사건은 비단 홍 고검장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삼성그룹과 범삼성가 핵심인사들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 고검장의 형이자 X파일 대화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홍석현 전 회장은 이미 주미대사직 사퇴서를 제출한 상태다.
정부측 우회지원 탄력
이러한 정황에 비춰볼 때 홍 고검장의 입장 표명 배경에는 삼성측의 대반격 플랜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노회찬 의원을 필두로 한 민노당과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등 삼성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모든 세력들이 이른바 ‘삼성 때리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 속에 이제부터라도 정면 대응하겠다는 게 대반격 플랜의 골자다. 특히 9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정치권이 상임위를 통해 X파일 및 대선자금 등과 관련해 삼성을 집중 공략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마냥 수세적인 방어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위기감도 깔려 있다. 따라서 삼성측은 화려한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이번 국감을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언론사 및 정치인에 대한 법적 대응도 적극 검토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정기국회가 시작된 여의도 정가 주변에서는 삼성 정보팀 관계자들이 그 어느때보다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회에 출입하는 정보팀의 숫자도 눈에 띄게 늘었고, 각 상임위별로 삼성과 관련한 자료를 취합하느라 정신이 없다.
삼성측도 정기국회나 국감 과정에서 삼성에 대한 악의적인 폭로나 이를 여과없이 보도한 언론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도 불사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안강민·김진환 전 서울지검장이 노회찬 의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인 만큼 차후 삼성가 핵심인사들과 관련한 악의적 폭로는 정치인과 언론을 막론하고 적극 대응하겠다는 것. 이처럼 삼성이 침묵을 깨고 정면돌파 전략으로 선회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우회적·간접적 지원이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실제로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치권과 재계 주변에서는 ‘삼성-정부 밀월설’이 끊이질 않았다. 삼성그룹 핵심 CEO 출신인 진대제 장관의 초대 정통부 장관 발탁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전격 발탁했다는 사실은 밀월설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여기에 노 대통령은 얼마 전 ‘97년 대선자금 수사중단’ 발언으로 삼성을 간접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노 대통령이 표면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조사를 반대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수사가 중단될 경우 실질적인 최대 수혜자는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참여연대 등 108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X파일 공대위가 지난달 26일 청와대 앞 구 정부종합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은 ‘97년 대선자금 수사를 덮자’는 노골적인 수사 중단 지시를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X파일 사건과 관련해 노회찬 의원과 전직 검찰 간부들의 송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삼성측의 대반격 플랜이 어떤 식으로 가시화될지 X파일의 또다른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홍성철 anderia@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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